고백하자면 저는 최근 몇 년 사이 사랑하는 세 마리의 개들을 연이어 잃었습니다. 그들을 떠나보낸 후 닥친 가장 큰 변화는 고요와 적막의 체감입니다.
그들과 나누었던 많은 것이 사실 나의 루틴이었고 그것들 거의 모두는 내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었습니다.
돌이켜보니 개와 함께 있을 때의 번잡함이야말로 즐거움이었고 애정이었고 내 육체를 움직이고 내 심리를 안정시킬 수 있었던 가장 역동적인 동기중 한 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인간을 기준으로 할 때 결코 완전한 적이 없었습니다.
모두 불완전한 존재였고 번거로움을 주었으며 잠시라도 소홀히 하면 엉망이 되는, 기르기 까다로운 화분 같았습니다. 언어 소통은 불가능하고 그나마 통한다고 느끼는 교감도 실은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것들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를 두고 본능이라고 하고 어떤 이들은 훈련의 결과라고 합니다.
어찌되었든 이 불완전한 존재를 매일 산책을 시켜야 했고 때마다 목욕을 시켜주어야 했으며 시간에 맞춰 물과 사료를 갈아 주어야 했고 아플 땐 병원을 들락거렸습니다. 모든 여행 스케줄은 이들에게 미칠 최소한의 영향을 우선해서 짜야만 했습니다. 그런데도 개를 보면 늘 즐거웠고 기쁘고 사랑스러웠습니다.
녀석들을 안고 가만히 가슴에 손을 대어 미세하면서도 힘차게 뛰는 심장의 움직임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때 얻어지는 경이로움은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감정이 단지 소유물에 대한 애착이 아니라는 건 잘 알지만 한편으로 이 사랑의 감정이 가진 본질이 무엇인지, 어디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누구나 다 그런 것인지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여튼 여태까지 내가 기른 개들은 최소한 내 관념속에서만큼은 성장 이전의 강아지로 남아 있습니다. 채 한 달이 안된 새끼였을 때나 관절이 약해져서 느릿느릿 걷는 노견일 때나 모두 그렇습니다. 어쩔 땐 인간보다도 늠름하고 어른스러운 적도 있었지만 그들에 대한 나의 근본적인 감정은 어린 강아지로서의 존재였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나를 투사했고 한편으로는 내가 어떤 일로 부실해졌거나 도움이 필요하거나 뭔가 상처를 받아 휘청이던 때 녀석들의 존재 자체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작은 불씨같은 안정감, 위안일 때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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