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은 몸을 갈라 떡잎을 만들고 떡잎은 비밀을 모아 나무로 자란다 통나무는 무수히 살을 갈라 한 장 종이쪽이 되고 종이는 몸을 벌려 역사를 받아들인다 무거운 역사, 그래서 책은 무겁다
그런데 진짜 역사는 폭풍우의 심장까지 직시하는
잎사귀에 적혀 있거나 잎새 사이를 나는 새의
반짝 숨결에 적혀 있지 진짜 책은 가볍다
[글.김응교.시인/그림.이현정.일러스트레이터]
칠레의 안토니오 스카르메타(Antonio Skarmeta)가 쓴 소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민음사)는 무기력하게 일상을 보내던 청년이 망명 시인의 전임 우편배달부가 되어 은유의 세계에 서서히 눈을 뜨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 소설의 백미는 주인공 마리오가 그의 연인 베아트리스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 사용한 은유들이다.
"그가 말하기를...... , 그가 말하기를 제 미소가 얼굴에 나비처럼 번진대요."
"그러고는?" "그 말을 듣고 웃음이 났어요."
"그랬더니?"
"그랬더니 제 웃음에 대해 뭐라고 말했어요. 제 웃음이 한 떨기 장미고 영글어 터진 창이고 부서지는 물이래요. 홀연 일어나는 은빛 파도라고도 그랬고요" (민음사 62p)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보았을 법한 낡은 흑백 사진 한 장이 있다. 열 두 명의 남자들이 사뭇 비장한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사진이다.
사진 속 남자들 대부분은 총을 들고 있고 그 중 검은 제복을 입은 남자 한 명은 유일하게 칼을 들고 있다. 총과 칼을 들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민간인은 아닐 것이라 짐작된다. 하지만 워낙 의복이 남루한데다가 통일마저 되어 있지 않아 선뜻 군인이라고 보기에는 망설여진다. 게다가 열 대여섯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앳된 소년의 모습까지도 보인다.
이 사진은 사실 1907년 대한제국 시절 경기도 양평 지역에서 항일 무장 투쟁을 벌였던 의병들의 실제 모습이다. 하지만 검은 제복을 입고 칼을 든 대장 김영백 의병장을 제외한 개개인의 상세한 신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당시 종군 기자로 대한제국에 주재하고 있던 프레더릭 아서 매켄지(Frederick Arthur McKenzie)의 저서 <대한제국의 비극 The Tragedy of Korea>(1908)에 수록되어 있다는 건 무척 다행한 일이다. 당시 항일 의병 투쟁사 연구 자료로서는 물론 역사적 실체로서 존재했던 의병들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매우 소중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떡잎은 비밀을 모아 나무로 자란다
통나무는 무수히 살을 갈라
한 장 종이쪽이 되고
종이는 몸을 벌려 역사를 받아들인다
무거운 역사, 그래서 책은 무겁다
그런데 진짜 역사는
폭풍우의 심장까지 직시하는
잎새 사이를 나는 새의
진짜 책은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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