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제물포구락부에서 온 편지 Vol.91

개항장의 숨은보석 제물포구락부


제물포구락부 메킨지홀
제물포구락부가 문화재활용 정책 1호 사업으로 출범하면서 첫 번째로 실행했었던 프로젝트는 동남쪽 벽면 전체를 가리고 있었던 가벽을 걷어내고 오랜 기간 동안 본의 아니게 숨겨져 있었던 네 개의 창을 복원하는 작업이었습니다.

덕분에 제물포구락부는 사시사철 그때그때 태양의 자전에 따라 실내공간의 빛과 그늘이 변화하는 그 어디서도 경험해보지 못한 감성을 일깨워주는 공간으로 시민 여러분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도시공간건축 전문가 유현준 교수는 새로운 세대는 공간을 소유하기보다 소비한다고 했습니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나를 드러내고 돋보이게 하는 욕망이, 독특한 느낌의 공간을 지속적으로 소비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제물포구락부 또한 그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늘 특별한 감성을 제공해드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2022년 제물포구락부 매킨지 홀은 인문학 아카데미를 운영하기 위한 좀 더 최적화된 공간으로 거듭나기 위해 대형 스크린과 사이니지, 유튜브 라이브 송출용 음향 시스템등을 개선해나가고 있습니다.

1883년 개항장에서 가장 모던했었던 제물포구락부의 정취가 소소한 조명연출을 통해 섬세하게 전개될 예정이오니 시민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제물포구락부의 서재
망가진 책에 담긴 기억을 되살리는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 (재영 책수선, 위즈덤하우스)
책을 좋아하는다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있을 겁니다. 
하나는 책을 읽는 행위, 즉 독서를 좋아한다는 의미일테고, 또하나는 물성으로서의 책 자체를 좋아한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 두 가지 이유 모두로 책을 좋아한다고 말해야겠습니다. 물론 책 읽는 속도보다 늘 구입하는 속도가 빠르니 후자의 의미가 조금은 더 크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아무튼 새 책이 나온다는 기대감, 책을 산 다음 첫 장을 펼치는 순간의 그 쾌감, 책을 읽는 행위 자체에서 오는 안락함, 다 읽은 책을 책장에 꽂고 바라보는 뿌듯함까지 그 일련의 과정 모두를 즐깁니다. 
그런저런 이유로 낡고 헤어진 오래된 책 조차도 쉽게 처분하지 못하고 쌓아두는 편입니다.

<바다와 노인> (한국독서문화원 1975)

그래서일까요?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물건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저는 어쩌면 책 한 권을 집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초등학교 초교 5학년 때 앞으로는 이런 것도 읽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아버지께서 사주신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입니다. 우리가 아는 그 헤밍웨이의 책이 맞습니다만 ‘노인과 바다'가 아니라 ‘바다와 노인’입니다. 

제목이 조금 우스꽝스럽게 뒤틀렸지만 여타 노인과 바다와는 비교할 수 없이 소중한 책입니다. 단순히 물리적인 시간이 담겨 있는 물성으로서뿐만 아니라 지금은 세상 밖에 계신 아버지와 함께 했던 어린시절의 기억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 어딘가에 아버지의 손때와 지문도 틀림없이 남아있으리라 생각을 하면 가슴 한편이 뜨거워지면서 아직 내곁에 남아있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느껴집니다.

책을 만질 때는 조금은 강박적이라 할 만큼 조심스럽게 다룹니다. 

책에 밑줄을 긋거나 낙서를 한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합니다. 페이지 모퉁이를 접는 것 조차 저에겐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끼는 책은 박물관의 유물 다루듯 장갑을 끼고 만지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제 책장에 있는 책들은 거의 새 책이라 할 만큼 깨끗한 상태로 꽂혀 있습니다. 하지만 책에 부여된 물성의 견고함도 흐르는 시간 앞에서는 별 의미가 없는 듯 합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만지며 애지중지 했는데도 아버지가 주신 ‘바다와 노인’은 만약 제가 아니었다면 진작에 버려졌을만큼 여기저기 헤어지고 바스라질 듯 낡아버렸습니다.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 (재영 책수선, 위즈덤하우스 2021) 

몇 년전 이 책의 보존 방법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할 무렵 눈에 들어 온 것이 바로 ‘책수선’이라는 단어였습니다. 
정확히는 ‘재영 책수선’이었습니다. SNS를 통해 책수선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왠지 저의 이야기를 듣는 듯 했습니다. 
아. 세상에는 오래된 책을 어쩌지 못하고 어떻게든 간직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나 말고도 이렇게 많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또 책을 수선하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이 분은 대체 어떤 분일까 라는 궁금증도 생겼습니다. 
그러면서 훗날 언젠가 오래되어 낡아버린 책과 그 책의 수선을 맡긴 주인의 사연들, 그리고 책을 수선하는 이의 이야기들을 모아 또 한 권의 책을 만든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은 연남동의 작업실에서 의뢰받은 낡고 망가진 책을 수선하는 ‘재영 책수선’의 대표가 쓴 책입니다. 

제가 생각한 바로 그 책입니다. 재영 책수선에 책을 맡긴 책주인들과 책에 얽힌 특별한 이야기들입니다. 같은 책은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고 낡아지고 훼손되는 과정은 모두 비슷합니다. 그러나 저자에게 맡겨진 책은 존재론적으로도 유일하지만 담겨 있는 시간, 사연 모두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것들입니다. 

그렇기에 저자 ‘재영 책수선’의 작업은 그 책에 담겨 있는 시간과 추억을 되살려 놓는 것과 동시에 또다른 시간과 추억을 덧입히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그 작업 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오래된 책에서 나는 책 냄새를 맡는 듯 합니다. 

아무튼 저의 ‘바다와 노인’은 낡고 바래고 페이지가 낱장이 되어 곧 바스라질 위기에 있습니다. 책을 어쩌지 못한 것은 오래된 물건이 시간의 흐름에 스러지는 것에 마음을 뺏기는 저의 성향 탓도 있지만 사실 저의 게으름 때문입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저도 ‘재영 책수선’에 이 책 '바다와 노인'의 수선을 맡기게 되겠지요? 그 때가 되면 아버지께서 사 주실 때의 추억과 지금까지 이 책을 매만졌던 저의 이야기에 새로운 시간을 더할 수 있을 겁니다.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 (재영 책수선, 위즈덤하우스)은 오래되고 낡은 책에 담긴 유일한 시간들과 이야기를 소중한 가치로서 세상에 내놓은 정말 좋은 책입니다.


그림자 유희 by 제물포구락부

신기하죠. 
계절 끝무렵이면 비가 오고 그 비가 그치면 계절이 바뀐다는 사실이. 겨울 문은 여지없이 열렸고 공기는 제법 쌩합니다. 
그림자는 더 길어졌고 짙어집니다. 그림자를 보니 문득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가 떠오릅니다. 

주인공 슐레빌이 자신의 그림자를 어떤 남자에게 판 대신 부와 명예를 얻지만 그림자가 없다는 사실 때문에 결국 파멸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겨울이 막 시작된 것 같은 12월 첫날. 제물포구락부 주변의 그림자들이 마치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듯 드리워져 있습니다


재즈브루잉

몇 일 전 음반 하나를 선물 받았습니다. 
<Succeeding The Lineage Of Jazz>라는 사뭇 진지한 타이틀의 앨범입니다. 재즈의 계보를 잇는다는 의미일테지만 판매용이 아니라서 조금은 의아했습니다. 

더욱이 인천음악컨텐츠협회가 제작하고 인천문화재단과 인천재능대학교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것을 보면 지역 문화 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고만고만한 앨범으로만 짐작했습니다. 그나저나 왜 하필 인천에서 재즈 앨범일까요? 


서양 근대음악이 우리나라에서 연주된 것은 공식적으로 대한제국 군악대가 설치된 1900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록으로는 1892년 지금의 자유공원 초입에서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체결 당시 이미 미국 전통 음악 '양키 두들(Yankee Doodle)'이 연주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또 제물포를 통해 입국한 선교사들에 의해 찬송가가 수없이 많이 불려졌습니다. 그 중심에 제물포구락부와 같은 음악을 필요로 했던 역사성을 가진 공간도 존재했으니 인천이야말로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라 불러야 될 것 같습니다. 1917년 미국에서는 재즈 최초로 앨범이 녹음되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뒤 라디오 방송이 대중화됨에 따라 재즈는 급속히 전 세계로 확산되었습니다. 재즈의 발상지가 미국인지라 국제적으로 커지는 미국의 영향과 재즈의 유행과 확산은 당연히 쌍곡선을 이루며 나아갔습니다. 인천은 알다시피 개항 초기 가장 먼저 서양 음악을 접했고 일본 패망과 동시에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미국의 영향을 가장 먼저, 그리고 직접적으로 받은 도시입니다. 

현재의 기준으로야 한국 재즈의 역사에서 인천이 차지하는 위치가 보잘 것 없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인천과 인천시민들이야말로 최선봉에서 재즈를 접하고 들었던 가장 힙했던 사람들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천에서 재즈가 연주되고 앨범이 나온다는 것은 상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앨범 <Succeeding The Lineage Of Jazz>은 단순히 지역 뮤지션들이 만든 재즈 앨범 이상의 가치를 품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앨범 <Succeeding The Lineage Of Jazz>는 인천음악컨텐츠협회장인 이민우씨가 전체 프로듀싱을 맡아 총 다섯 팀의 연주를 각각의 트랙에 담은 컴필레이션 앨범입니다. 

트랙 1은 스윙 넘치는 보컬 하모니가 압권인 The Bliss Korea의 The Bliss Ladies입니다. The Bliss Korea의 리더 최윤미의 곡으로 마치 전설의 팀 스윙글 싱어즈(Swingle Singers)를 연상케하는 연주입니다. 

트랙 2는 크루너로서는 약간 하이 톤인 보컬 최용민이 Everyday I’m Doing well을 부릅니다. 적당한 스윙감에 더해 스윗한 드럼의 브러쉬와 보컬의 음색은 앞으로 초겨울 시즌송으로 불러도 될만큼 따뜻하고 아름답습니다. 너무 짧게 연주된 탓에 아쉬움을 남기게 하는 후반부 스캣 역시 일품입니다. 

트랙 3의 Marionette는 드럼리스 색소폰 트리오라는 색다른 구성입니다. 지오바니 미라바시의 앨범 <Avanti>를 떠올리게 하는 임재선의 피아노 솔로 인트로는 비장미가 철철 넘치고 송하철의 색소폰은 마리오네트가 인간에 의해 부여된 운명을 거부하듯 자신만의 임프로비제이션을 맘껏 펼치는 듯 합니다. 

이밖에 트랙 4의 The Wedding Song(HY!), 트랙 5의 Like a Virgin(103 PROJECT) 역시 좋습니다. 두 팀 모두 정통 재즈라기 보다는 가벼운 팝적인 요소가 강한 보컬 팀이지만 각기 색채감 있는 음색을 자랑합니다. HY!의 The Wedding Song은 앞으로 결혼식장에서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예감과 함께 톡톡 튀는 가사와 보사노바 스타일의 리듬이 사랑스럽습니다. 

특히 마지막 트랙 103 PROJECT의 Like a Virgin은 스웨덴 출신으로 재즈씬에서 아카펠라 팀으로 유명한 <리얼그룹>에 비견되는 하모니를 들려줍니다. 정말 좋습니다. 아쉽게도 제작된 앨범의 수량이 그리 많지 않다고 합니다. 게다가 앨범과 음원의 정식 판매 경로는 별도로 개설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방역 지침을 준수한다면 제물포구락부에서도 감상이 가능합니다만 혹 앨범을 구입하고 싶으신 분은 제물포구락부 아트디렉터에게 연락주시면 자세히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jemulpoclub@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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