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제물포구락부에서 온 편지 Vol.84

개항장의 숨은보석 제물포구락부



제물포구락부의 서재
개와 사람에 관한 내용이지만 사실은 지극히 사랑에 관한 책 
<개와 나> (캐롤라인 냅, 고정아 역, 나무처럼)

고백하자면 저는 최근 몇 년 사이 사랑하는 세 마리의 개들을 연이어 잃었습니다. 그들을 떠나보낸 후 닥친 가장 큰 변화는 고요와 적막의 체감입니다. 
그들과 나누었던 많은 것이 사실 나의 루틴이었고 그것들 거의 모두는 내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었습니다. 

돌이켜보니 개와 함께 있을 때의 번잡함이야말로 즐거움이었고 애정이었고 내 육체를 움직이고 내 심리를 안정시킬 수 있었던 가장 역동적인 동기중 한 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인간을 기준으로 할 때 결코 완전한 적이 없었습니다. 

모두 불완전한 존재였고 번거로움을 주었으며 잠시라도 소홀히 하면 엉망이 되는, 기르기 까다로운 화분 같았습니다. 언어 소통은 불가능하고 그나마 통한다고 느끼는 교감도 실은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것들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를 두고 본능이라고 하고 어떤 이들은 훈련의 결과라고 합니다. 

어찌되었든 이 불완전한 존재를 매일 산책을 시켜야 했고 때마다 목욕을 시켜주어야 했으며 시간에 맞춰 물과 사료를 갈아 주어야 했고 아플 땐 병원을 들락거렸습니다. 모든 여행 스케줄은 이들에게 미칠 최소한의 영향을 우선해서 짜야만 했습니다. 그런데도 개를 보면 늘 즐거웠고 기쁘고 사랑스러웠습니다. 

녀석들을 안고 가만히 가슴에 손을 대어 미세하면서도 힘차게 뛰는 심장의 움직임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때 얻어지는 경이로움은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감정이 단지 소유물에 대한 애착이 아니라는 건 잘 알지만 한편으로 이 사랑의 감정이 가진 본질이 무엇인지, 어디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누구나 다 그런 것인지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여튼 여태까지 내가 기른 개들은 최소한 내 관념속에서만큼은 성장 이전의 강아지로 남아 있습니다. 채 한 달이 안된 새끼였을 때나 관절이 약해져서 느릿느릿 걷는 노견일 때나 모두 그렇습니다. 어쩔 땐 인간보다도 늠름하고 어른스러운 적도 있었지만 그들에 대한 나의 근본적인 감정은 어린 강아지로서의 존재였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나를 투사했고 한편으로는 내가 어떤 일로 부실해졌거나 도움이 필요하거나 뭔가 상처를 받아 휘청이던 때 녀석들의 존재 자체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작은 불씨같은 안정감, 위안일 때도 있었습니다.

저자 캐롤라인 냅(Caroline Knapp)이 쓴 <개와 나>는 개에 대한 책이지만 사실은 지극히 사랑에 관한 책입니다. 20년간 술을 동반한 삶을 살다가 어느날 카페에서 어떤 남자와 개의 교감을 보고는 개를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후 동물보호소에서 작은 세퍼트 잡종 강아지 ‘루실’을 만납니다. 그렇게 충동적일지도 모르는 강아지 루실과의 만남은 알콜중독에서 벗어났지만 고뇌와 고독의 삶에서 고통스러하고 있던 캐롤라인 냅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았습니다. 이 책에는 저자 캐롤라인 냅과 루실의 관계와 교감을 넘은 사랑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과 개와의 관계가 등장합니다. 

저마다의 다양한 관계를 통해 개와 인간의 관계뿐 아니라 인간의 심리 자체를 들여다 보게 됩니다. 결국 이런 관계들은 독자 자신과 주변과의 관계에 대해 을 돌아보며 생각하게 만듭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내내 웃고 울면서 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15년간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다가 프리랜서로 독립하며 본격적으로 작가의 삶을 살았던 캐롤라인 냅은 첫 작품 <드링킹>으로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올랐습니다. 

이 책 <개와 나>는 저자의 두 번째 책입니다. 
여기에 더해 <욕구들>과 함께 저자의 중독 삼부작이라 일컫습니다. <드링킹>은 짐작하다시피 술의 문제를, <욕구들>은 젊은 시절 음식을 거부하며 마른 몸매를 향한 지나친 중독 과정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개와 나>는 술을 끊은 후 만난 개 루실을 향한 애착과 사랑, 은둔의 삶을 절절하게 파고들어 개에 대한 ‘중독’이라 부릅니다. 

개에 대한 애정을 술이나 육체에 대한 지나친 애착과 중독이라며 동일하게 취급하는 건 불만입니다만 어쨋든 그만큼 지극한 애정이라 생각하기에 기꺼이 수용할 수 있습니다.

재즈브루잉

1988년 5월 13일. 새벽 세 시 경. 암스테르담의 싸구려 호텔 프린스 헨드리크 앞을 지나던 한 행인은 피투성이가 된 채 죽어있는 남자 시신 한 구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한다. 
조사 결과 남자의 실수인지 자살인지 확실치 않으나 외부침입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고 호텔 창문을 지탱하고 있는 빗장이 함께 떨어져 있는 걸로 보아 실족사한 것으로 잠정 결론 내렸다. 사망한 남자가 투숙했던 방에는 트럼펫이 있었고, 수소문 끝에 시신 안치소를 찾은 남자의 지인들에 의해 신원이 밝혀졌다.

             쳇 베이커 (Chet Baker 1929.12.23~1988.5.13)  사진 : www.mywhere
중성적 음색을 가진 목소리와 특유의 우울함을 담은 트럼펫 연주자. 

재즈계의 제임스 딘이라 불릴 정도로 매력적인 용모를 가진 쿨 재즈의 전설. 시신의 주인공 쳇 베이커(Chet Baker 1929.12.23~1988.5.13)의 굴곡진 삶은 결국 이렇게 비참하게 막을 내렸다. 5월 10일 로테르담에서 잼 세션을 한 후 잠적한 쳇 베이커는 이틀 뒤인 12일에 네덜란드 방송국의 생중계가 예정된 중요한 공연에 나타나지 않았다. 매니저와 밴드 멤버들 조차 그의 행방을 아는 이는 없었다. 

그리고는 호텔 창문에서 추락한 시신으로 발견된 것이다. 마일즈 데이비스로부터 시작된 쿨 재즈(Cool Jazz)(Miles Davis)가 동시대 장르인 비밥과 하드밥보다 인기가 많았던 것에는 다분히 말끔한 용모를 가진 백인 스타 연주자들의 역할이 매우 크다. 
쳇 베이커, 스탄 게츠, 데이브 브루벡, 제리 멀리건 등이 바로 그들이다. 그 중에서도 쳇 베이커는 트럼펫을 연주할 뿐 아니라 독특한 매력의 목소리로 인기를 독차지한 스타중에 스타였다. 비록 테크니션은 아니었으나 듣는 이의 폐부를 서늘하게 찌르는 독특한 트럼펫 소리는 그만이 낼 수 있는 완벽한 장기였다. 

때로는 마일즈 데이비스의 아류로 취급되기도 했으나 청중은 오히려 열광했다. 그가 부르는 불안한 음정과 음색의 노래는 수려한 외모와 더불어 수많은 여성들의 모성심리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는 정작 그런 인기와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

                            말년의 쳇 베이커 (1988년 4월 라스트 콘서트, 독일 하노버 )
쳇 베이커는 1952년 스탄 게츠와 함께 첫 레코딩을 한 후 제리 멀리건 밴드 멤버로 이름을 알렸다. 판타지와 퍼스픽 레코드 등에서 게리 멀리건 밴드의 일원으로 모두 10장의 음반에 참여하였고 이때 발표된 ‘My funny valentine’으로 스타덤에 오른다. 

하지만 그런 영예는 처음부터 불안했다. 곧 마약상습복용 협의로 구속되었기 때문이다. 그후 그는 불안정한 결혼생활, 폭력사건 연루, 미국과 유럽을 오가는 방랑, 빈번한 재기와 몰락 등으로 대중으로부터 외면을 받았다. 이 모든 것을 야기한 것은 그의 삶 전부를 갉아먹은 마약중독이었다. 이 지독한 마약중독은 결국 암스텔담의 허름한 호텔의 창가에서 추락사함으로서 종지부를 찍는다. 

쳇 베이커의 대표곡은 말할 것도 없이 ‘My Funny Valentine’이다. 쳇 베이커는 이 곡을 1952년에 게리 멀리건과 함께 처음 녹음했다. 1954에는 퍼시픽 재즈 레코드에서 Chet Baker sings라는 앨범으로 트럼페터가 아닌 보컬리스트로 녹음하였고 호불호가 갈렸음에도 그의 얼굴을 내세운 자켓 때문인지 상당한 히트작이 된다. 이때부터 그의 중성적인 목소리가 여성팬들을 부르게 되었다. 

여기에는 물론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영화배우 제임스 딘을 연상케 하는 청순한 외모도 큰 몫을 차지한다. 이후 쳇 베이커의 부른 My Funny Valentine은 모두 40여 개의 버전이 존재할만큼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다. 

이 곡은 원래 1937년 브로드웨이에서 8개월 동안 상영된 뮤지컬 쇼 ‘용감한 연인들 (Babes in Arms)’에 수록된 곡이다. 아마도 역사상 가장 많이 녹음된 재즈 발라드일 것이다. 약간 우스꽝스럽게도 들리는 제목, 단순한 멜로디와 코드는 별로 눈길을 끌만한 요소는 아니다. 하지만 쳇 베이커는 자칫 밋밋하게 느껴질 이 곡의 몇몇 곳에 클라이막스를 기가 막히게 만들어 냈다. 
그야말로 쳇 베이커만이 할 수 있는 쳇 베이커만의 마법이다.

소개하는 버전은 1988년 4월에 독일 하노버에서 북부독일방송(NDR) 빅밴드와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으로 진행한 공연 실황 버전이다. 
사실 쳇 베이커는 리허설에 한번도 나오지 않아 공연 자체가 무산될  수도 있었으나 다행히 4월 28일 예정대로 진행되어 성공을 거둔다. 

결국  이 공연은 그가 남긴 최후의 앨범이 되었다. 보름여가 지난 후 유명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공연에서는 쳇 베이커가 가장 좋아했던 곡들 위주로 연주되었다. 빅밴드와 오케스트라까지 가미된 연주는 가히 역사적인 현장의 스케일과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재즈 뮤지션으로서 가장 많이 언급되고 재즈에 어울릴 만한(?) 드라마틱한 삶의 주인공이지만 솔직히 쳇 베이커를 얘기하는 건 늘 망설여진다. 말쑥한 백인이었으며 백인 여성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지만 그의 삶과 연주, 목소리 모두 재즈가 가진 가장 어두운 블루(Blue)를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이 언발란스한 블루지(Bluesy)함을 표현하기가 여간 까다로운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까다로운 것보다는 오히려 그에 대해 너무나도 할 말이 많아서 일지도 모른다. 
 젊었을 때는 단지 낭만적으로만 들렸던 My Funny Valentine이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듣게 되면 뭔지 모를 감정에 사로 잡히는 자신을 보게 된다. 
제목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멜로디. 특정할 수 없는 슬픔을 자아내는 중성적인 목소리. 내 삶의 고뇌와 고독을 저절로 회상하게 만드는 묘한 힘을 느낀다. 
이것이 재즈의 매력일까? 아니면 단지 쳇 베이커만의 매력일까? 그만큼 쳇 베이커와 그의 음악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즈의 환상과 지나간 청춘의 기억을 모두 담고 있는 영원한 신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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