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제물포구락부에서 온 편지 Vol.50

자주적 개항의 상징적 서사자원



‘석호필’은 한때 영화 프리즌 브레이크의 주연이었던 배우 웬트워스 밀러(Wentworth Miller)를 일컫는 한국식 이름이었다. 하지만 ‘석호필’이라는 이름의 진짜 주인공은 따로 있다.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의 212분 중 유일한 외국인이 계시다. 그가 바로 3·1운동 민족 대표 33인에 더해 34번 째 민족대표 라 불리는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다.  캐나다 출신 수의사로 1916년 8월 세브란스에 세균학 교수로 부임한 스코필드는 1919년 3·1 만세운동에 참여하면서 그 해 4월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현 화성시 향남읍)에서 일어난 제암리 학살사건을 세계에 알린 장본인이다. 또한 3.1 만세운동 당시 탑골공원에 모인 군중들이 흔들던 태극기 사진들의 대부분을 그가 찍었다.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William Schofield, 1889 ~ 1970) (사진 : 시사저널)

그의 한국 이름이 바로 석호필(石虎弼)이다. 석호필의 한자는 각각 돌 석(石), 호랑이 호(虎), 도울 필(弼)이다. 돌처럼 굳은 마음으로 호랑이처럼 강하게 한국을 돕겠다는 의지를 담은 셈이다. 
그래서 그의 별명 또한 ‘호랑이’다. 윌리엄 스코필드는 1889년 3월 15일 영국 워릭셔(Warwickshire) 럭비(Rugby)에서 4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고등학교를 마치고, 농장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1907년 홀로 캐나다 토론토로 이주하여 농장에서 일하면서 토론토 대학교 온타리오(Ontario) 수의과 대학에 들어갔으나 1910년에 소아마비를 앓게 되면서 지팡이를 짚게 된다. 1911년 세균학 박사학위를 받으며 졸업한 후 1913년에 결혼, 1914년부터 모교에서 세균학을 강의했다.  1916년 당시 한국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 교장으로 있던 에비슨(Avison, O. R.)의 초청으로 선교사 자격으로 한국에 들어와 이후 세균학 교수로 근무하였다. 
[그림:조관제 화백]


제물포구락부의 서재

식순이, 차순이, 공순이. 각각 식모, 버스안내양, 공장 직공을 일컫는 이 단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어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말 속에 담겨 있는 삶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느껴봤다면 차마 입밖으로 내면 안될 말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가난했고 못배웠고 궁색했던 우리들의 어머니, 누이, 여동생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마치 금기어처럼 여겨지는 이 단어들이 그땐 어떠한 심적 제재 조차 없이 불리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이 단어들로 부름을 받는 이들은 애초부터 사는 게 지쳐 상처 받을 겨를 조차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입 하나라도 덜기 위해, 혹은 동생의 학비를 위해, 어떤 때는 집안 가계를 위해 시골에서 상경한 누이들의 첫 직업은 단연 식모였습니다.  노동 강도에 비해 저임금이었지만 특별한 기술이 없던 그들에게 선택의 여지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서울 생활에 적응할 때쯤이면 상대적으로 고임금이었던 버스안내양으로 이직했고 마지막으로 가야 했던 직장은 버스안내양보다 체력적으로 덜 힘들다고 여겨진 공장 직공이었습니다.


 먹고 잘 수만 있다면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도 않고 선택했던 식순이는 소위 ‘주인집’ 식구들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멸로부터 시달려야 했습니다. 차순이는 달리는 버스 출입문에 매달려 자기 몸무게의 몇배나 더 나가는 승객들을 차 안으로 밀어 넣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삥땅’을 적발한다는 명목하에 알몸 수색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공순이는 사철 햇볕이 들지 않는 좁은 작업장에서 종일 일을 해야 했고 잦은 야간 잔업 탓에 얼굴이 늘 누렇게 떠 있었습니다. 손은 늘 상처 투성이었습니다. 이들은 가장 큰 도시에 살면서도 삶은 가장 작고 초라했습니다. 
산업 역군이란 그늘 아래에서 착취와 인권 유린은 도무지 존립할 수 없는 단어였습니다.  이 책 <삼순이>는 60-80년대까지 이 땅에서 불렸던 수많은 ‘순이’들의 삶과 청춘을 복원하는 책입니다. 감상에 젖은 사변적인 글이 아니라 아홉 명의 삼순이들을 직접 찾아 인터뷰와 자료를 통해 완성한 르뽀르따주입니다. 읽으면서 몇 번이나 책을 덮었는지 모릅니다. 



이토록 그녀들의 삶이 내 가까이 있었음에도 그걸 외면하고 있었다는 게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그것에 대한 ‘미안함’은 여태까지 느꼈던 사전적인 의미의 ‘미안함’과는 결이 다른 감정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그 많던 삼순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이 책의 부제 ‘시대가 만들고 역사가 잊은 이름’처럼 시대가, 역사가 흘렀으니 모두 사라진 걸까요? 
저자는 지금 여기 우리 주변에 삼순이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말합니다. 다른 방식의 편견과 비하, 무시 차별을 당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도처에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미안함이 반성으로 대체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선 이렇게라도 그녀들의 삶을 끄집어 내어 직면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땀과 고통이 우리의 성취물을 만들어 내고 있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 작은 발걸음을 내 딛는 일에 이 책 <삼순이 : 식모, 버스안내양, 여공> (정찬일, 책과함께)이 분명 도움을 줄 것입니다.


재즈 브루잉


"Glad to be back to my Country!” 나의 나라에 와서 기쁩니다!  2014년 한국 공연 당시 ‘Korea’와 발음이 똑같은 성을 가진 Chick Corea가 한 말이다. 
재즈 피아니스트의 전설인 그가 2월 9일(현지시간) 미국 탬파베이 지역의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79세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그를 두고 재즈계의 전설이라는 말 외에 적당한 수식어가 별로 없다. 
키스 자렛, 허비 행콕과 더불어 살아있는 레전드라 불렀건만 이제 그가 연주하는 모습을 영영 볼 수 없게 되었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듯 얼마전 자신의 페이스북에 “음악을 환하게 타오르도록 나와 여정을 함께 한 모든 사람에게 감사하다"는 글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65차례 그래미상 후보로 노미네이트 되었고 이 중 재즈 그래미 63년 역사상 가장 많은 23차례 수상하는 기록을 남겼다.  올 블루스(All Blues), 트리올로지 2(Trilogy 2) 앨범이 다음달 14일에 열리는 그래미 재즈 부문 후보에 올라 사후 수상 가능성도 열려 있다. 1994년 첫 내한 공연 이후 총 아홉 차레나 방한할 정도로 한국과는 친숙한 아티스트였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혈통을 이어 받은 칙 코리아는 그의 출신답게 평생 라틴 스타일의 음악을 담아 낸 피아니스트였다. 특히 70년대에 레이블 ECM을 통해 정통 스타일 뿐 아니라 아방가르드, 일렉트릭 퓨전 분야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오늘의 역사

제물포구락부 인문학 아카데미 
제5회 창비 청소년도서상 교양기획부문 대상 수상자 강창훈 작가의 특강이 이번주 토요일(2월20일) 진행됩니다. 3.1만세운동 기념일을 맞아 역사교육계의 저명한 저자와 함께 진행되는 제물포구락부 인문학아카데미에 시민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현장 수강을 원하시는 분들은 아래 예매링크를 클릭하세요.


엘리자베스 키스 특별전
엘리자베스 키스가 1921년에 그린 <정월 초하루 나들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설날 광화문 앞 풍경을 담은 작품입니다. 키스가 그의 책 <동양의 창>에서 “정월 초하루인 설은 한국 최대의 명절이다. 이 날은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제일 좋은 옷으로 갈아입고 나들이를 한다”라고 언급한 작품입니다. 
정갈하면서도 화려한 색감의 실빔을 입은 한 여성과 때때옷을 입은 두 아이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뒤로는 해태상과 광화문이 보이고 해태상 주변엔 상인으로 보이는 사람과 물건을 사거나 구경하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더 뒤로는 멀리 북악산이 보입니다.
작품 속 풍경은 요즘 같아선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장면입니다.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혀 낯선 모습은 아닙니다. 해태상 얼굴이 조금 우스꽝스럽게 보이긴 하지만 별로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사실 엘리자베스 키스는 화가로서 정식으로 활동하기 전 일본에 머물던 시기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캐리커쳐를 그려주기도 했습니다. 그런 점을 미루어본다면 다소 유머스럽게 표현한 해태상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보통은 무심히 넘길만 하지만 눈썰미가 있는 사람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잘 차려입은 두 아이 중 여자 아이가 들고 있는 막대기에 매어진 풍선입니다. 풍선이 마치 헬륨을 주입한 풍선처럼 공중에 떠 있습니다.

 해태상 주위로 보이는 몇개의 풍선도 마찬가지입니다. 엘리자베스 키스가 이 그린 시기는 1921년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기 한국에 이미 헬륨 풍선이 있었다는 뜻일까요? 그림을 보고도 왠지 미덥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풍선의 역사를 조금만 살펴보면 절대 수긍하지 못할 일은 아닙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세계 최초의 수소를 넣은 고무 풍선은 1824년에 이미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 신화의 이카루스 이야기에서 보듯 인간 혹은 사물을 공중에 띄워 올리는 일은 인류의 오랜 꿈이었습니다. 중력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비행기가 발명된 후에야 비로소 어느 정도의 목적을 달성했지만 사실은 그 이전에도 끊임없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비행기처럼 별도의 에너지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공기보다 가벼운 기체를 이용하여 공중에 띄우는 방식이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기구와 풍선입니다. 이 중 먼저 발명된 것은 기구입니다. 1783년 프랑스 몽골피에 형제가 짚을 태워 데운 공기를 이용하여 약 300m의 고도까지 올라갔다고 합니다. 이것이 역사상 최초의 기구입니다. 
더 나아가 1852년에는 앙리 자크 지파르가 기구에 증기기관을 달아 프로펠러로 전진하는 세계 최초의 비행선을 발명하였습니다. 한편 풍선은 유럽의 중세 시대부터 동물 창자 등의 재질로 만들어져 사용되었습니다. 공중에 부양하는 지금과 같은 풍선은 1824년 영국의 물리학자 ‘마이클 패러데이가 얇은 고무를 주머니 형태로 만든 다음 수소를 주입시켜 처음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그로부터 무려 100년 가까이 시일이 지난 1921년에 수소 혹은 보다 안전한 헬륨 가스를 넣은 풍선의 존재가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닐겁니다. 

풍선은 특히 아이들한테 사랑받는 놀잇감입니다. 가벼워서 크게 힘들이지 않고 흔들며 놀 수 있습니다. 색감 또한 화려해서 눈도 즐겁습니다. 작품 속 아이들은 더구나 당시엔 매우 귀했을 헬륨 풍선을 들고 설날 나들이를 하게 되었으니 한껏 들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간토 대지진 때 목판이 파손, 한정된 작품만 남아 있어 매우 희귀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의 복식과 민속학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될 만한 작품이라 더 안타깝습니다. 더욱이 이렇게 완벽한 설빔을 차려 입은 가족의 모습을 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제물포구락부의 <엘리자베스 키스의 올드 코리아 특별전>은 말 그대로 특별합니다. 비록 원화 작품 전시는 아니지만 대형으로 출력된 고해상도 디지털 스캔본을 통해 오히려 인물과 풍경의 세밀한 점까지 감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엘리자베스 키스의 올드 코리아 특별전 기간은 2월 28일까지입니다.

[작품: 정월 초하루 나들이 1921. 엘리자베스 키스, 목판화 38 x 25.7]

스토리 by 제물포구락부

서른 네 번째 민족대표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선재도 어촌계 바지락 채취

선재도는 인천광역시 옹진군 영흥면에 있는 섬이다. 1871년 전후까지만 해도 소우도로 불렸다. 영흥도와는 영흥대교, 대부도와는 선재대교로 연결되었으며 인천광역시와 버스로 이어진다. 서해 최대 규모의 바지락 양식장이 있으며, 바지락은 2월에서 4월까지가 제철이다.
 [사진촬영: 홍승훈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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