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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커피커피로 읽는 인물 - 이능권

리디언스
2021-05-01
조회수 516

강화 대동창의진(大東倡義陣) 의병대장 

이능권 (李能權 1864~1909)


1904년 2월 러일전쟁 도발 후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유럽 열강으로부터 자신들의 한국 침략 용인을 받아낸 일본은 1905년 11월 대한제국의 외교권과 통치권을 박탈한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였다.


이후 고종은 을사늑약이 일본의 강압으로 이루어진 불평등 조약임임을 폭로하기 위해 1907년 러시아 니콜라이 2세의 주최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제2회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를 파견하기로 한다.



대한제국 헤이그 파견 밀사 이준, 이상설, 이휘종(좌로부터)



1907년 4월 전 평리원 검사 특사 이준은 부산을 출발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하여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을 만나 5월 21일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한다. 6월 4일, 시베리아를 거쳐 당시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이준과 이상설은 전 러시아 공사관 참서관 이위종과 합류한다. 이들은 곧 헤이그로 출발하여  6월 25일 도착한다.

이밖에 당시 감리교회 선교사였던 호머 헐버트 목사에게도 헤이그 파견 밀명을 전달, 밀사 파견에 적극 지원하도록 밀사활동을 밀명을 통해 부탁하였다. 이에 헐버트는 헤이그 특사가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일본이 대한제국 대표의 만국 평화 회의 참석 방해 공작으로 회의에 참석치 못한 상태에서 스위스, 프랑스를 경유하며 서방 언론사들과 접촉하도록 지원했다. 결국 만국 평화 회의 특사 참석은 좌절되었고 이준은 현지에서 순국하였다.

이상이 우리가 알고 있는 헤이그 특사 사건 대강의 전말이며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순국한 이준을 비롯 이상설, 이위종. 제4의 특사라 불린 헐버트다. 하지만 이들과 함께 행동한 중요한 인물이 또 한 명 있다는 걸 아는 이는 별로 없다.

앞서 고종은 1907년 헤이그 밀사 파견 이전에도 국제사회에 대한제국을 압박하는 일본의 부당함을 알리려 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번번히 무산되었다. 이에  일본군경을 감시를 피해 블라디보스톡까지 특사를 무사히  보낼 수 있는 인물이 필요하였다.






1908년 서울에서 체포될 당시 이능권 ( 사진 : 인천일보)



강화 출신 이능권((李能權 1864~1909)이 바로 그 인물이다. 이능권은 대한제국 육군장교와 수군 군관 출신답게 육지와 항구 곳곳에서 감사를 하던 일본군경과 밀정을 따돌리고 특사들을 블라디보스톡까지 무사히 도착시켰다. 

한편 일본은 헤이그 특사 파견을 핑계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킴과 동시에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였다. 이에 반발한 군인들은 서울 시위대를 비롯 전국 곳곳에서 무장 투쟁이 일어났다. 헤이그 특사 호송이라는 임무를 무사히 마친 이능권 역시 1908년 고향 강화에서 의병을 조직하였다. 이능권은 약 300명에 달하는 의병을 규합해 대동창의진(大東倡義陣)이라 이름하고 항일투쟁을 전개하여 막대한 군자금 조달과 수많은 전과를 올렸다.

강화도 전등사에 은닉한 무기들을 일본군에게 넘겨준 주지 송계찬을 징벌했고 교동  경찰주재소를 습격하였다. 김유영등 일본에 협력하던 친일분자들에게서 군자금을 탈취하였다. 이밖에도 수많은 군자금 모집 활동과 교전을 통해서 다수의 일본군과 부역자들을 처단하였다. 1908년 10월경에는 강화 전역을 장악하여 위협을 느낀 일본군이 서울 본대에 증원을 요청했을 정도로 세가 막강하였다.

이후  이능권은 무기구입을 위해 서울에 잠입하여 머무르다 1908년 12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만다. 이듬해인 1909년 9월 27일 경성공소원에서 강도와 모살죄(謀殺罪)라는 죄목으로 교수형을 언도 받아 12월 2일 순국하였다. 시신은 한강변에 가매장되었으나 비밀리 고향 강화 국화리에 모셔졌다가 현재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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