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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커피커피로 읽는 인물 -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

리디언스
2020-08-22
조회수 401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


“내가 언니 엘스펫과 한국을 처음 방문한 것은 1919년 3월이었다. 3.1 운동이 일어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한국은 깊은 비극에 휩싸여 있었다. 수천명의 한국 애국자가 감옥에 갇혀 고문을 당하고 어린 학생들까지 고초를 겪고 있었다. 그들은 폭력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고 그저 줄지어 행진하며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쳤을 뿐인데도 그런 심한 고통과 구속의 압제 속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일본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얼굴에 그들의 생각이나 아픔을 전혀 내비치지 않았다. (중략) 

한국인들은 일본의 간사한 농간 탓에 조국을 잃었고 황후마저 암살당했으며 고유 복장을 입지 못하고 학교에서 일본말만 사용하도록 강요받았다. 나는 길을 가다가 한국 전통의상을 입은 사람 옷에 검은 잉크가 뿌려져 있는 것을 보았다. 일본 경찰이 한국의 민족성을 말살시키려고 흰옷을 입은 한국인들에게 그런 만행을 저질렀다.”





20세기 초 한국의 풍경과 인물을 아름다운 색채로 그려낸 영국 스코틀랜드 출신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가 1946년에 발간한 <올드 코리아 Old Korea>의 서문에서 밝힌 글이다. 당시 일제의 압박에 고통스러워하는 한국을 바라보는 키스의 애정어린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엘리자베스 키스는 1887년 스코틀랜드 애버딘셔에서 태어났다. 전문적인 미술 교육을 받지는 않았으나 일본과 한국, 중국, 필리핀, 말레이지아, 인도네시아 등을 여행하며 수채화와 목판화 작품을 남긴 여류 화가이다. 

언니 엘스펫과 형부 로버트슨 스콧의 초청으로 1915년 일본을 방문한 후부터 여러 지방을 방문하여 그림을 남겼다. 1919년 언니와 형부가 영국으로 귀국하기 전 언니와 함께 한국을 여행하기로 하고 1919년 3월 28일 한국에 왔다. 애초에 아이들을 위한 책 한 권 정도를 만들자는 생각으로 방문한 한국은 키스의 작품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화가로 명성을 쌓게해준 나라가 된다. 한국의 풍경과 사람들에게 매료된 키스는 언니가 귀국하였음에도 한국에 남아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모델을 구해 그림을 그렸다. 마침 키스가 방문했던 당시는 삼일 만세운동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은 시기였다.




과부 The Widow 수채화



“모델은 한국 북부 지방 출신으로 일제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서 풀려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몸에 고문당한 흔적도 있지만 표정은 평온했고 타고난 기품과 아름다움이 전신에서 뿜어져 나왔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 여인의 남편 또한 독립운동에 가담했다가 일본에 목숨을 잃고 아들마저 행방불명이었다고 전해진다. 1915년부터 1919년 3월 한국에 입국하기 전까지 거주했던 일본이라는 나라와 그 미술에 매료당하고 있었던 키스에게 일본이 한국에 행한 야만성은 충격 그 자체였다. 어쩌면 아름다운 풍경과 그속에서 살아가는 순박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그녀의 예술성을 키워 준 것일지도 모른다.





달빛 아래 서울의 동대문 Moonlight At East Gate, Seoul 1920 채색 목판화 



그해 가을 일본으로 돌아간 키스는 동경에서 한국에서 그린 수채화 전시회를 하던 중 목판화의 장인이었던 와타나베의 권유로 한국 관련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인 ‘달빛 아래 서울의 동대문’을 목판화로 만들게 되었다. 푸른 달빛 아래 돌담의 거친 질감과 귀가를 서두르는 듯한 사람들, 저 멀리 보이는 가옥의 불빛까지 한국의 정서가 깊게 배여 보는 이 누구나 짙은 낭만을 느끼게 하는 명작이다.  이 작품의 대성공을 계기로 이후로 화가로서의 명성이 나기 시작했고 평생 120여점의 작품을 목판화와 동판화로 만들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키스의 한국과 관련된 작품들이 특별히 눈길을 끄는 이유는 풍경도 풍경이지만 무엇보다도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살아가는 진솔한  모습을 많이 그렸다는 것이다. 1921년 한국을 다시 찾은 키스는 어느날 결혼식에 초대를 받아 참석하곤 다수의 결혼식의 풍경 작품을 남긴다. 



신부 행차 Marriage Progession, Seoul 1921 채색 목판화 




시골 결혼 잔치 Country Wedding Feast 1921 채색 목판화




한국 신부 Korean Bride 1938 채색 목판화




특히 ‘한국 신부’라는 제목을 붙인 작품에 대해 키스는 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놀랄만치 세밀한 관찰력을 보여주었다. 


"야단법석 잔치가 열리는 가운데, 오늘의 주인공인 신부는 방 안 상석에 앉아 있었어요. 몸집이 자그마한 신부는 마치 밀랍 주형틀에서 그대로 부어낸 것처럼 전혀 움직임이 없었어요. 반짝이는 머리에는 은과 산호로 장식된 우스꽝스러운 화관을 얹고 있었죠,  얼굴은 물분으로 하얗게 칠을 했고 눈썹은 높다란 반월형으로 그려져 있었어요. 제대로 앞도 못 볼 것 같았고, 밝게 칠한 입술은 어찌나 앙 다물었는지 본인 결혼식인데 제대로 먹을 수 조차 없겠더라구요. 양쪽 뺨에는 동그랗게 암갈색 점을 찍었는데 꼭 가면을 쓴 것 같았어요. 신부는 실제 사람이라기보다 상징적 존재처럼 보였어요."


이런 정도의 표현으로 보아 키스가 한국인과 일상속으로 얼마나 깊이 동화되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1921년 다시 한국을 찾은 키스는 그해 가을 서울에서 서양화가로서는 최초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시회는 ‘저녁이면 김치 냄새가 났다’라고 말 할 정도로 대단한 성황을 이루었다. 한국에 주재하고 있는 외교관, 선교사 등은 물론 한국 사람들도 다수 왔다고 한다. 이후 키스는 1934년에 두번째 전시회를 서울에서 열었다.

한편 한국에 와서 묵었던 숙소의 주인은 바로 한국 최초의 여성을 위한 의과대학을 창설한  로제타 홀 박사였다. 그의 아들 셔우드 홀은 당시 결핵 퇴치를 위한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하는 사업을 1932년부터 펼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실의 도안은 YMCA 직원이 만들었으나 전문적인 도안의 필요성을 느낀 셔우드 홀 박사는 이를 키스에게 의뢰하였고 부탁을 받은 키스는 1934, 1936, 1940년 등 세 번에 걸쳐 도안을 그려주었다고 한다.



좌로부터 아기를 업은 여인 (1934년 도안), 연날리기하는 아이들 (1935년 도안), 두명의 한국 아이들 (1940년 도안)




특히 마지막 ‘두 명의 한국 아이들’ 작품은 셔우드 홀이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되었던 1940년에 발행된 크리스마스실 도안이다. 그러나 이 도안은 아이들이 입은  옷이 한국 전통 복장이라는 것, 뒷 배경의 산이 너무 높아 보안 규정을 어겼다는 것, 일본의 연호 대신 서기를 사용했다는 등의 이유로 압수 당했다고 한다. 소식을 접한 키스는 당연히 분노했으나 홀 박사의 설득으로 작가의 자존심이 허락하는 선에서 수정해 주었다고 한다. 서기를 사용하지 않는 대신 일본의 건국 연도 역시 사용하지 않고 9년동안 크리스마스실 발행되었다는 의미의 ‘Ninth Year’로 표기하는 한편 아이들과 산 사이에 작은 대문을 그려 넣었던 것이다. 특이한 것은 이때부터 한국 필명인 ‘기덕()을 그림에 그려 넣고 낙관을 찍었다는 사실이다.

한국과 일본 외에도 중국, 필리핀, 말레이지아, 인도네시아 등을 여행하며 작품을 남겼지만 키스가 화가로서의 명성을 얻게 된 것은 한국 사람과 풍경을 그린 작품으로 유명해진 이후부터였다. 엘리자베스 키스의 애정 어린 한국 관련 작품은 1946년에 발간한 <올드 코리아 Old Korea>에 오롯이 담겨져 있다. 영국으로 귀국한 이후 제2차대전과 한국전쟁 발발로 인해 더 이상 한국을 방문할 수 없었던 키스는 평생 독신으로 지내다 1956년 4월 69세의 일기로 런던에서 세상을 떠났다. 추모금을 한국전쟁 부상자들을 위한 기금에 써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진정 한국을 사랑한 엘리자베스 키스의 진심에 애도를 표할 수밖에 없다. 

제물포구락부의 스페셜 블렌드 <엘리자베스 키스>는 부드러운 바디감에 과일의 달콤함과 산미가 동시에 느껴진다. 한국의 풍경과 인물을 아름다운 색채로 그려낸 그의 작품처럼 화사한 플레이버 또한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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