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물포구락부 스토리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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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커피커피로 읽는 인물 - 호머 베절릴 헐버트 (Homer Bezaleel Hulbert)

리디언스
2020-06-21
조회수 936


호머 베절릴 헐버트 (Homer Bezaleel Hulbert)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의 B구역 한쪽에는 다음과 같은 묘비명이 씌인 묘석이 있다.

“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묘비명의 주인은 호머 베절릴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헐벗 또는 흘법(訖法), 허흘법(許訖法), 할보(轄甫), 허할보(許轄甫)등 다양한 한국어 이름으로도 불리었던 미국인이다.

웨스트민스트 사원이라면 영국의 위인들과 역대 왕들이 잠든 곳이다. 죽어서 이곳에 묻히는 것 보다 영광스런 칭송은 없을 것이다. 이곳보다 한국에 묻히기를 원했다는 것은 그만큼 고인(故人)이 한국을 사랑했다는 뜻이다.

헐버트는 1886년 한국 최초의 근대교육기관인 육영공원에서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내한했다. 1891년 한국 최초의 순 한글 세계 지리 교과서 <사민필지>를 만들어 육영공원에서 교재로 사용했다. . 한국어에 매우 유창했고 특히 한글의 우수성에 대해 인식하고 1892년 <한국소식 The Korean Repository> 창간하여 <The Korean Alphabet>이라는 논문을 발표해 한글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렸다. 주시경 선생과 더불어 띄어 쓰기와 쉼표,마침표를 도입했으며 한글 로마자 표기법을 고안하기도 했다. 1896년에는 그동안 구전으로만 전하고 있던 ‘아리랑’을 최초로 악보로 만들어 기록했다. .





1901년부터는 영문월간지 <코리아 리뷰 Korea Review>를 발행, 한국의 교육뿐만 아니라 일제의 압박이 점점 심해지던 당시의 한국에 대한 정치, 외교 문제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고종의 신임을 받아 외교 고문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1905년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미국 대통령에게 고종의 밀서를 전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에 발견된 당시 미국 NYT 신문 기사에 의하면 당시 고종이 헐버트에게 “나 대한민국 황제는 … 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노라. … 최상의 방책으로 미국과 이 조약의 종결을 이끌어내길 바라오. …” (NYT 1905년 12월 기사)라는 전보를 보냈다고 한다.

또한 고종은 1909년 헐버트에게 왕의 개인 재산인 ‘내탕금’을 찾아달라는 부탁과 함께 관련 서류를 맡겼다고 한다. 헐버트는 이를 1948년 한국 정부에 전달했다고 알려졌다. 이런 사실들에 비추어 고종이 얼마나 그를 신뢰했는지, 또 헐버트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로 대한제국의 역사적 현장에 있었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다. 

1907년에는 헤이그 특사 파견에 일조하여 ‘이준’을 비롯한 3인의 특사에 이어 ‘제4의 특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일제의 압력을 받아 강제 추방 당했으나 이후에도 한국의 자주 독립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했다.

한편 헐버트는 그가 창간한 <코리아 리뷰> 1901년 6월호에서 다음과 같이 제물포구락부의 개소식 현장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다. 

 

“새롭게 단장한 제물포클럽 개회식을 6월22일(토요일) 오후 4시30분에 가졌다. … 모두 건물 내부의 멋진 방과 시설들을 둘러본 후, 영국 영사인 허버트 고페씨가 훌륭한 서비스를 언급하고 클럽 빌딩에 관해 설명을 해주었다. … 대단한 감격 속에서 새로운 이 사업을 위해 모두 축배를 들었다. … 클럽 건물은 좋은 전망에다 넓은 당구장과 독서실, 그리고 근처에 테니스장을 갖추고 있어 성장하는 제물포 사회의 색다른 장식을 선사했다. 클럽 건물이 오래도록 물결치듯 활동하기를!”

 


2020년 제물포구락부 올라가는 길 vs 1908년 제물포구락부 올라가는 길



얼핏 들으면 제물포 거주 외국인 전용 클럽 개회식을 축하하는 단순하고도 관례적인 메시지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헐버트는 고종의 최측근으로서 외교 전략 자문역을 담당했던 전략가였다. 그러한 그의 행적을 미루어 본다면 마치 고종이 청,일의 외교적 간섭으로부터 탈피할 목적으로 ‘정동구락부’를 이용한 사례에서 보듯이 일제의 압박을 견제할 정략적 수단으로서 제물포구락부를 거론한 것이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추측이 가능하다. 

제물포에 대하여 언급한 1906년 기사 내용도 흥미롭다. 


"제물포는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입항지이다. 이 항구는 근접성 때문에 무엇보다도 이러한 장저을 갖게 되었다. 서양인이나 일본인 거주구역의 부동산은 평방미터 당 20엔에서 30엔으로 거래되어 이곳의 실제 생활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엿볼 수 있다. 일본인 인구도 만 명을 넘었으며 한국 주민의 숫자도 3만 명을 넘었다. 외국인 거주 지역에는 눈에 띄는 공공건물은 아직 거의 없지만 주거지는 비교적 잘 조성되어 있다. 대부분의 외국인 주택들이 모여 있는 가파른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는 바다 경치는 이곳에 살고 싶은 매혹을 느끼게 한다. 1마일에 걸쳐 있는 부두에는 항구의 교역 물자를 처리할 수 있는 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그럼에도 대량의 화물들이 부두에 이적되어 있어 방수포로 덮을 수 없는 경우 비바람에 노출되고 있다. 교역은 물품을 다루고 저장하는 시설에 항상 앞서서 이루어진다는 사실만큼 이 항구에서의 삶을 잘 보여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 1906년 Korea Review 헐버트


1949년 7월 2일 자 '스프링필드 유니언'에 보낸 기고문에서는 '한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빼어난 민족'이라는 근거를 다음과 같이 다섯가지항목으로 제시했다.

첫번째, 1주일이면 터득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문자인 한글 발명.

두번째,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만든 거북서의 일본 격파.

세번째, 임금이 국사를 편견 없이 기록하여 3년마다 정리, 3부씩 보관한 역사 기록 문화.

네번째, 기원전 1122년 한족 5천명을 이끌고 넘어온 기자를 한민족으로 만든 이민족 흡수 문화.

다섯번째, 1919년 3.1운동 때 보여준 한민족의 애국심.


이후 1949년 아흔에 가까운 노구임에도 광복절 초청 국빈 자격으로 7월 29일 방한하였으나 일주일 뒤인 8월 5일 기관지염으로 안타까운 생을 마감했다. 위에 언급한 묘비에 적힌 말은 실제로 헐버트가 한국행 선박에 오르면서 남긴 말이다. 장례식은 대한민국 최초의 사회장으로 치루어졌으며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안장되었다. 195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외국인 대상으로는 최초로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태극장(독립장)이 추서되었다. 2014년에는 한글 보존과 보급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 받아 대한제국 금관 문화 훈장을 추서 받았다. 

 

푸른 눈의 애국지사 호머 베절릴 헐버트 

제물포구락부의 스페셜 블렌드 <호머 베절릴 헐버트>는 묵직한 바디임에도 밀크 초콜릿의 달콤함과 견과류의 고소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마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했던 헐버트의 한국에 대한 사랑인 듯 목넘김에서의 산뜻한 흙내음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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