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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커피제발트 읽기와 커피 주문. 그 난관과 성공

리디언스
2020-04-10
조회수 279

두 번 세 번 다시 읽기엔 좀 머뭇거리게 되는 책들이 있는가 하면, 한 번만 읽고 지나쳐 버리기에는 너무나 아쉬워 두고두고 곁에 두는 책들이 있다. W.G. 제발트의 책들이 후자의 경우다.

제발트는 주로 폐허, 잔해, 황량, 망각, 쇠락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사라졌거나, 사라지고 있거나, 혹은 곧 사라질, 어쩌면 지극히 개인적인 어떤 것들에 대한 독백 같은 것들이다. 어차피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것들의 궁극적인 미래는 결국 소실이거나 망각의 대상이다. 그러니 필연적으로 불멸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 진실을 마주하게 만드는 제발트의 문장들 앞에서는 차마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곤혹스러워할 때가 많다.


제발트가 얘기하는 폐허와 잔해, 쇠락은 단지 지나간 시간의 발굴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과거와 현실과 허구를 뒤섞어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소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제발트를 읽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제발트를 읽어 낸다는 건 밀도 속에서의 공허함, 과거이면서 현재성, 장르의 모호성을 경험한다는 뜻이다. 잊힌 자들에 대한 기록은 그에 의해 매번 지금 이 자리에 현현한다. 그래서 그의 소설을 읽노라면 기억이 단순히 과거에 함몰되어있는 유물만이 아님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한번 읽기 시작한 W. G. 제발트의 책은 밤을 새워서라도 단번에 끝내야 한다. 소설 속 화자들이 말하고 기록하는 기억은 매우 명료하다. 하지만 그걸 읽어 내야만 하는 독자의 기억은 고작 서너 페이지에 대한 기록조차 깡그리 잃어버릴 만큼 허술하다. 중간에 한 번이라도 책을 덮었다가는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한다. 자신의 기억력에 대해 실망할 게 뻔하다. 농밀하고 미분적인 화자들의 기억을 보통 능력의 독자로서는 도무지 따라갈 방법이 없는 것이다

정제된 문장과 서사 앞에서 주위의 모든 존재, 시간, 공기, 공간 같은 것들과 내가 얼마나 지속할 수 있는지 묻는 것은 부질없다. 지나간 것들을 회상할 때 아름다워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므로 아름답다는 걸 알게 된 것은 순전히 제발트 덕분이다.

<현기증. 감정들>은 1990년에 발표한 제발트의 첫 번째 소설이다. 각각 별개인 네 편의 글로 구성되어 있다.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스탕달과 카프카가 작품 속 화자인 ‘나’이면서 제발트 자신이기도 한 일종의 자전 문학이다. 그러면서도 역자 배수아의 말처럼 카프카의 제발트식 변용과 확장‘이라 부를 만큼 곳곳에 카프카의 숨이 느껴진다.



특히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이탈리아와 그 인근 지역답게 ‘커피’가 무수히 등장한다. 예컨대 12세기 인문주의자이자 시인인 ’페트라르카‘의 불행을 그가 커피를 마시지 못했다는 것과 연관 짓는다든지, 베네치아 거리의 바에서 모닝커피를 마시며 편지를 읽고, 리모네의 작은 호텔에서는 글을 쓰는 내내 일정한 간격으로 에스프레소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는 식이 그렇다. 그런가 하면 티롤 지방의 삭막한 역 구내식당에서는 맛없는 모닝커피를 마시며 ‘치커리 커피’에 대해 언급하다가 웨이트리스와 충돌(?)하기도 한다. 치커리 커피는 전쟁 중 커피 공급이 부족할 때 커피 맛과 유사한 치커리 뿌리를 볶아 임시변통으로 마시는 음료다. 그러므로 자신이 서비스한 커피가 마치 싸구려 치커리 커피같이 형편없다는 말로 오해할만하다. 어렸을 적 이웃이 끓이던 터키식 커피를 회상하기도 한다. 제발트가 대단한 커피 애호가였다는 걸 짐작하게 된다.

두 번째 이야기 ‘외국에서’의 화자는 빈에서 베네치아로 기차를 타고 간 다음 고단했던 여행의 사흘째 밤을 보내고 이튿날 월요일 아침 또다시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기 위해 역사로 간다. 역사 안에는 서서 먹어야 할 정도로 매우 혼잡한 카페가 있다.

‘이러한 산만하고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모든 식기를 금방이라도 깨뜨릴 것처럼 다루는 것이 습관인 듯한 직원들의 손길에 의해 유리잔과 커피잔 받침, 재떨이 등이 대리석 탁자에 놓였다. 마침내 주문한 카푸치노잔을 받았을 때는 순간적으로 생애 최고의 난관을 이겨내고 성공을 거두었다는 성취감마저 들었다.’ (현기증. 감정들, W.G. 제발트, 문학동네, 68p)

어렵사리 커피 주문에 성공(?)한 후 숨을 돌리며 식당 주변을 둘러보는 화자의 넋두리에서 잠깐이나마 제발트식 유머에 웃음을 짓게 된다. 고작 카푸치노 한 잔을 받아들었음에도 이런 극적인 반응이라니. 하기야 간절한 만큼 만족은 큰 법이다. 고단했던 여행 뒤의 또 다른 여행을 앞둔 시점에서, 더욱이 주문조차 쉽지 않았던 상황에서 마시는 커피는 그야말로 ‘성취감’을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백하자면, 제발트의 책 읽기가 그렇다. 어떤 작품이든 처음 접하는 순간부터 이미 '제발디언'이라는 게토에 갇혀버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문장들 속에서 길을 잃는다 해도 매 순간 황홀하다. 예기치 않은 '불안'들 속에서도 자발적 함몰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다 읽고 나서의 성취감은 그 어떤 작가의 작품을 끝낼 때와 비교해도 적지 않다.

사족 하나를 붙이자면 제발트의 문장은 무척 길다. 짧고 간결한 문체에 익숙한 독자라면 조금은 지루하게 읽어야 할지도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긴 문장들을 읽는 맛이 그리 나쁘지 않다. 긴 호흡이 필요한 문장을 읽으며 느껴지는 독해의 모호함이 오히려 책을 오랫동안 붙들고 곱씹게 해 주기 때문이다. 단숨에 읽히고 이해되는 책을 서둘러 끝냈을 때의 허전한 포만감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잔상이 남는다. 제발트 소설의 매력이기도 하다. 설사 그의 책을 읽는다는 것이 영원한 미완이 될지 모른다 해도 첫 책 <자연을 따라. 기초시>부터 마지막 책 <캄포 산토>까지, 모든 책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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