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5월 인천 연수구 청학동에 소재하던 외국인 묘지를 인천가족공원으로 이전하던 중 한 외국인 무덤에서 성인 손가락만한 크기의 십자가 장신구 하나가 발견된다. 인천 개항 당시의 외국인 실물 자료로는 최초로 발견된 이 청동제 십자가는 길이 8cm, 폭 5cm의 장신구 끝에 고리가 달린 것으로 보아 묵주 형태인 것으로 밝혀졌다. 앞면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뒷면에는 라티어 명문 ‘The Misericordia' 즉 ’자비‘라고 새겨져 있다. 무덤의 주인은 바로 인천 개항기 미국 출신 영국 성공회 소속 선교사로 낯선 이국 땅인 조선에서 숭고한 의료 봉사를 하다 생을 마친 ’엘리 랜디스(Eli B. Landis 1865~1898)‘이다.

랜디스는 미국 펜실베니아주 랭커스터 출신으로 1890년 9월 29일 제물포를 통해 조선에 입국했다. 이후 주거지 인근에 시약소 (施藥所, 약국)을 열었고 현재 인천 내동 성공회교회 터에 인천 최초의 서양병원인 성누가병원(St. Luke's Hospital)을 설립하여 ‘선행을 베풀어 기쁨을 누리는 병원’이라는 의미의 ‘낙선시의원(樂善施醫院)’이라 이름 지었다. 아울러 그는 ‘의료계의 큰 인물’이라는 뜻의 ‘약대인(藥大人)’으로도 불리기도 했다.

랜디스 박사가 개설한 야간영어학교 학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 (가운데 서양인이 박사)[사진=대한성공회 내동교회]
의료 봉사를 하는 한편으로는 야간학교를 열어 영어를 가르쳤다. 그에 대한 추모사에 ‘그는 한국 한문학의 끈질긴 연구자이기도 했다. 수많은 저녁에 병원을 지나갈 때 우리는 그가 한국식으로 맹자 또는 논어를 읽는 소리를 들었다’라고 적혀 있을 정도로 학구열이 높았고 언어 학습 능력 또한 뛰어났다고 한다. 유창한 한국어 구사는 물론 한문 해독까지 가능하여 불교 경전을 번역하는가 하면 1895년부터 1898년 영면할 때까지 약 3년간 한국의 민속, 문학에 관하여 많은 글을 남기기도 했다. 그가 남긴 글들은 지금도 많은 연구자들에게 인용되고 있어 초기 한국학 연구 자료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고아원까지 운영하면서 많은 어린이들을 접한 그는 어린이들의 구비 전승 동요에도 관심이 많아 ‘한국 어린이들의 노래’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그는 이 글에서 동요의 가사를 정확히 보존, 전승하기 위해 로마자 표기안을 이용 한국어 음운을 로마자에 일일이 대응시켜 적어놓았다. 단순히 기록하고 보존코자 하는 의미 외에 한국 동요가 가진 본연의 특성을 최대한 살리면서 소통 방식과 함의를 왜곡시키지 않기 위해 가사에 주석을 붙여 표기하는 등의 남다른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랜디스는 안타깝게도 조선에 온지 8년만인 1898년에 33세의 일기로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사인은 평소 앓던 지병에 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랜디스가 하루 최대 1,300여 명의 환자를 돌보는 날까지 있었다니 사망 원인이 어쩌면 과로에 의한 것은 아닐까 하는 짐작을 할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개항기의 조선에서 종교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의료, 교육, 보육, 한국학 연구 등의 다양한 분야에 걸쳐 엘리 랜디스 만큼 생의 모든 것을 통 털어 봉사하고 헌신한 외국인도 드물다. 모든 것이 미흡했던 시기에 조선을 사랑한 그의 헌신과 노고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이번 주 제물포 구락부의 스페셜 브렌드 커피 <엘리 랜디스>는 무엇보다도 맛과 향의 밸런스가 뛰어나다. 독특한 산미가 입안을 사로잡는가 하면 첫 모금에서 혀끝으로 느껴지는 단맛과 목 넘김으로 느껴지는 쓴맛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짙은 향의 여운은 마지막 모금을 마실 때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마치 엘리 랜디스가 다양한 분야에서 헌신한 것처럼 어느 것 하나 모자라거나 빠짐이 없는 커피다.
Tip : 미국 커피의 역사 2
1970년대 시애틀에서 시작된 대표적인 스타벅스 신화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보스턴 차 사건에 맞닿아 있다. 이 사건으로 미국의 차 소비는 줄어들고 대체제인 커피의 소비는 상대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이다. 결국 차는 영국의 상징으로 남게 되었고 반대로 커피는 미국 독립의 상징성을 뛰어넘어 유럽의 전통적인 커피 커피하우스와는 결이 다른 미국식 커피전문점으로서의 새로운 길을 가게 된 셈이다.
2017년 5월 인천 연수구 청학동에 소재하던 외국인 묘지를 인천가족공원으로 이전하던 중 한 외국인 무덤에서 성인 손가락만한 크기의 십자가 장신구 하나가 발견된다. 인천 개항 당시의 외국인 실물 자료로는 최초로 발견된 이 청동제 십자가는 길이 8cm, 폭 5cm의 장신구 끝에 고리가 달린 것으로 보아 묵주 형태인 것으로 밝혀졌다. 앞면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뒷면에는 라티어 명문 ‘The Misericordia' 즉 ’자비‘라고 새겨져 있다. 무덤의 주인은 바로 인천 개항기 미국 출신 영국 성공회 소속 선교사로 낯선 이국 땅인 조선에서 숭고한 의료 봉사를 하다 생을 마친 ’엘리 랜디스(Eli B. Landis 1865~1898)‘이다.
랜디스는 미국 펜실베니아주 랭커스터 출신으로 1890년 9월 29일 제물포를 통해 조선에 입국했다. 이후 주거지 인근에 시약소 (施藥所, 약국)을 열었고 현재 인천 내동 성공회교회 터에 인천 최초의 서양병원인 성누가병원(St. Luke's Hospital)을 설립하여 ‘선행을 베풀어 기쁨을 누리는 병원’이라는 의미의 ‘낙선시의원(樂善施醫院)’이라 이름 지었다. 아울러 그는 ‘의료계의 큰 인물’이라는 뜻의 ‘약대인(藥大人)’으로도 불리기도 했다.
랜디스 박사가 개설한 야간영어학교 학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 (가운데 서양인이 박사)[사진=대한성공회 내동교회]
의료 봉사를 하는 한편으로는 야간학교를 열어 영어를 가르쳤다. 그에 대한 추모사에 ‘그는 한국 한문학의 끈질긴 연구자이기도 했다. 수많은 저녁에 병원을 지나갈 때 우리는 그가 한국식으로 맹자 또는 논어를 읽는 소리를 들었다’라고 적혀 있을 정도로 학구열이 높았고 언어 학습 능력 또한 뛰어났다고 한다. 유창한 한국어 구사는 물론 한문 해독까지 가능하여 불교 경전을 번역하는가 하면 1895년부터 1898년 영면할 때까지 약 3년간 한국의 민속, 문학에 관하여 많은 글을 남기기도 했다. 그가 남긴 글들은 지금도 많은 연구자들에게 인용되고 있어 초기 한국학 연구 자료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고아원까지 운영하면서 많은 어린이들을 접한 그는 어린이들의 구비 전승 동요에도 관심이 많아 ‘한국 어린이들의 노래’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그는 이 글에서 동요의 가사를 정확히 보존, 전승하기 위해 로마자 표기안을 이용 한국어 음운을 로마자에 일일이 대응시켜 적어놓았다. 단순히 기록하고 보존코자 하는 의미 외에 한국 동요가 가진 본연의 특성을 최대한 살리면서 소통 방식과 함의를 왜곡시키지 않기 위해 가사에 주석을 붙여 표기하는 등의 남다른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랜디스는 안타깝게도 조선에 온지 8년만인 1898년에 33세의 일기로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사인은 평소 앓던 지병에 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랜디스가 하루 최대 1,300여 명의 환자를 돌보는 날까지 있었다니 사망 원인이 어쩌면 과로에 의한 것은 아닐까 하는 짐작을 할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개항기의 조선에서 종교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의료, 교육, 보육, 한국학 연구 등의 다양한 분야에 걸쳐 엘리 랜디스 만큼 생의 모든 것을 통 털어 봉사하고 헌신한 외국인도 드물다. 모든 것이 미흡했던 시기에 조선을 사랑한 그의 헌신과 노고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이번 주 제물포 구락부의 스페셜 브렌드 커피 <엘리 랜디스>는 무엇보다도 맛과 향의 밸런스가 뛰어나다. 독특한 산미가 입안을 사로잡는가 하면 첫 모금에서 혀끝으로 느껴지는 단맛과 목 넘김으로 느껴지는 쓴맛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짙은 향의 여운은 마지막 모금을 마실 때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마치 엘리 랜디스가 다양한 분야에서 헌신한 것처럼 어느 것 하나 모자라거나 빠짐이 없는 커피다.
Tip : 미국 커피의 역사 2
1970년대 시애틀에서 시작된 대표적인 스타벅스 신화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보스턴 차 사건에 맞닿아 있다. 이 사건으로 미국의 차 소비는 줄어들고 대체제인 커피의 소비는 상대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이다. 결국 차는 영국의 상징으로 남게 되었고 반대로 커피는 미국 독립의 상징성을 뛰어넘어 유럽의 전통적인 커피 커피하우스와는 결이 다른 미국식 커피전문점으로서의 새로운 길을 가게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