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물포구락부 스토리 아카이브

재즈,어번스케치,3D모델링,여행가 그리고 남겨진 이야기.

읽는커피커피로 읽는 인물 - 연기우 (延基羽)

리디언스
2021-05-23
조회수 216

대한제국군 장교에서 의병으로

연기우 (延基羽)



강화도 지역은 조선 후기부터 통상을 요구하며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입이 잦았던 곳이다. 그럴 때마다 이들에 맞서 격렬히 저항해야 했던만큼 그 격전의 현장이 유난히 많이 남아 있다. 대한제국 시절 초기에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부사관 이상 약 100명, 일반 사병이 900명이나 될 정도의 거대한 군영이었던 적도 있었다. 특히 일제 강점기를 전후하여 이곳을 기반으로 세를 규합하고 의지를 다진 투사가 많다. 비록 강화도 출신은 아니나 강화를 수비하던 진위대 소속 장교로서 1907년 8월 군대가 해산되자 의병을 일으켜 활동했던 연기우(延基羽)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강제로 해산되어 일본군에 감시를 받고 있는 대한제국군 모습 (사진:위키백과)




1907년 7월 31일 정식으로 대한제국군에 대하여 해산명령이 떨어졌으나 이에 불응하여 서울 시위대의 봉기를 시작으로 전국 각지역 시위대의 봉기가 일어났다. 강화를 수비하던 강화 진위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8월 9일 강제로 해산당하여 무기와 군복을 반납할 수밖에 없었다. 강화진위대 부교였던 연기우는 이에 울분을 토로하며 해산군인들과 함께 무기고를 점령하고 무기와 탄환을 탈취하여 확보하였다. 강화도의 해산군인들이 항일의병으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연기우(미상~1914년)는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인창리에서 성장하였다. 강화 진위대가 해산되자 동료들과 전등사에 모여 의병모집을 밀의하여 강화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제물포 등에서 투쟁하다가 여의치 않자 부하 60여명을 거느리고 적성, 삭령, 철원, 마전, 장단 등지로 진출하였다.

1907년 가을에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하는 13도 연합 의진이 형성되고 1908년 1월 대대장의 직책으로 서울진공작전에 참가하였다. 연기우는 부하들을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미리 약속했던 다른 부대와 합류하지 못하고 기밀 또한 누설되어 작전은 실패하였다.



연기우 의병장 어록비 (사진:인천일보)





이 전투에서 연기우는 일본군의 총탄을 맞아 부상당한 후 체포되었으나 압송되는 과정에서 탈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창의 한북대장이 되어 20명~40명의 소수 병력으로 게릴라전을 감행하며 철원, 연천, 포천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1월 포천군 지역에서 일본헌병대와 교전하여 2명을 사살한 것을 비롯 12월에는 철원에서 일본 헌병 5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 뒤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를 넘나들며 활동했다. 1910년에는 구월산, 지리산 등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여 전과를 올렸다. 

대한제국군 장교출신으로 알려졌지만 본래 학문에 뜻을 둔 유생으로 여러 사정으로 인해  군인이 되었다고 한다. 일본 경찰의 기록에 의하면 연기우는 작은 키에 다부진 몸집을 가졌으며 왼쪽 관자놀이와 왼쪽 어깨에서 팔뚝까지 화상을 입어 상처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공사를 분명히 가릴 줄 아는 인물로 알려졌다. 가족이 굶주리고 있다는 소식을 전한 자신의 아들에게 부하 하나가 50원을 주었으나 연기우는 크게 노하며, “이것은 군수금(軍需金)이다. 누가 감히 사사로이 쓸 수 있겠는가!" 하고 그 돈을 도로 빼앗고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1910년 2월부터 일제가 의병소탕전에 총력을 기울이면서 활동에 어려움을 겪다 1914년 5월 마침내 강원도 인제 지역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어 장렬히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0 0

연락처


주소:인천광역시 중구 자유공원남로 25

전화번호:032-765-0261

이메일:jemulpoclub@gmail.com

찾아오시는길


#제물포구락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