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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커피커피로 읽는 인물 - 조지 클레이턴 포크 (George Clayton Foulk)

리디언스
2021-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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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장교의 신분으로 조선을 변호했던 의인

조지 클레이턴 포크 (George Clayton Foulk, 1856-1893) 




조지 클레이턴 포크와 그의 동료가 쓴  조선과 시베리아 견문록 (사진 : 오마이뉴스)



개항기 미국 공사관의 무관으로서 조선 주재 미국 대리공사를 역임하면서도 조선을 위해 대변했던 인물이 있다.  그가 바로 1884년 6월 취임하여 1887년 6월 퇴임한  미국 대리공사 조지 클레이턴 포크 (George Clayton Foulk, 1856-1893)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마리에타(Marietta)에서 태어난 조지 클레이턴 포크는 미국 애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직후 1876년 아시아 분함대 소속 앨럿 호(Alert)를 타고 뉴욕 항에서 출발,  대서양, 지중해, 수에즈 운하를 거쳐 인도양에서 일본까지 이어지는 1년여의 긴 항해를 한다. 그 후 1877년 소위로 임관하고 1882년까지 아시아 분함대에서 근무하다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1882년 6월  귀국 항해길에 오른 26살의 조지 포크는 부산과 원산을 방문하게 되었고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 중국어와 일본어는 물론 한국어까지 공부하게 된다.





보빙사 일행 (사진 : 중부일보)



미국에 있던 포크는 유창한 한국어 덕분에 이 시기 민영익을 필두로 미국을 방문한 조선 최초 방미(訪美) 사절단인 보빙사(報聘使)의 유일한 통역으로 선발되었다. 포크는 이어서 미국 일정은 물론 유럽 순방에도 동참했으며 이듬해 1884년 5월 보빙사 일행이 귀국할 당시 체스터 아서 미 대통령에 의해 주한미대사관 해군무관으로 임명돼 제물포를 통해 조선으로 왔다.





거북선 그림을 처음 소개한 더 선(왼쪽)과 보스턴글로브 기사 (사진 : 연합뉴스)





뉴욕공립도서관에 있는 거북선 그림 목판인쇄물 (사진: 연합뉴스)




외국 주재 미국 무관의 임무 중 하나는 주재국 정세 보고였다. 포크 역시 1884년 9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가마를 타고 조선의 주요 지방들을 시찰하면서 수도권의 군사요새와 지역민심 등 한반도 정세를 상세하게 파악해 해군장관 및 해군정보국에 보고했다. 나중에 CIA는 포크 공사를 `인적 네트워크를 통한 정보 수집(Humint)의 선구자'로 높이 평가하고 이를 계기로 해외공관에 무관파견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계기가 된다. 이때 포크가 입수하여 소장했던 대동여지도가 미국 위스콘신주립대(밀워키) 도서관에 보관 중이다. 또한 이순신 장군의 철갑선인 ‘거북선’을 서양에 처음으로 알린 사람이기도 하다.

한편 1885년 1월 주한 미국 공사였던 푸트 공사가 갑자기 사임하게 되어 대리공사에 포크가 임명된다. 전임이었던 푸트공사가 대사관의 공금을 모두 가져가 버리는 바람에  포크는 경제난과 건강 악화에 고통을 받기도 하였다. 1886년 9월 10일 포크가 부모님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이 때의 어려움이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저는 자주 생각합니다. 차라리 죽으면 해방이 될 것이라고. 제가 처해 있는 이 무서운 수렁으로부터 죽어야 벗어날 것이라고."


포크는 1885년 1월부터 1886년 6월까지 임시대리공사를 역임했고 이후 공사관 파커(W.H. Parker, 1826-1896)가 부임했으나 알코올 중독으로 3개월 만에 해임되자 1886년 9월부터 12월까지 임시대리공사직에 재임명된다. 그러니까 포크는 1885년 1월부터 1886년 6월까지, 1886년 9월부터 1886년 12월까지 대리공사를 두 번 역임한 것이다. 

29세의 포크에게  두 번씩이나 대리공사를 맡겼다는 대목에서 당시 조선에 대한 미국의 평가가 얼마나 낮았는지 알 수 있다. 조선은 말 그대로 통상할만한 가치도 없는 후진국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미국 상선 제네럴 셔먼호 (사진 : 아시아경제)




1885년 포크는 본국 정부로부터 1866년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하다가 침몰당한 미 상선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관련해 조선 정부에 피해보상을 요구하라는 훈령을 받고 고민하게 된다. 하지만 포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답변서를 본국으로 보내 정부의 지시에 저항한다.


"셔먼호 도착 시기는 대원군의 전제적 권력 행사가 최고조에 이르고 있던 때였습니다. 기독교인이 박해의 표적이 됐습니다. 프랑스의 예수회 신부들을 포함한 많은 기독교인들이 처형됐습니다. 또한 수천 명의 비기독교인들도 기독교인으로 의심을 받아 처형당했습니다.

평양 일대에서 박해는 특히 심했기에 지역 전체가 흥분과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프랑스 신부들의 죽음, 그리고 기독교 박해를 보복하기 위해 외국인들이 쳐들어올 거라는 불안감이 전국적으로 퍼져 있던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사정이 그러하다 보니, 셔먼호가 접근해 올 때 사람들은 한결같이 복수하러 온 것이라고 여겼으며 온갖 억측과 공포가 퍼졌습니다. 외국인에 대한 혐오감이 없는 사람들조차도 자기가 방관하고 있으면 외국인과 내통한 자로 지목돼 목이 달아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공격에 가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조선인들은 그러한 공포와 흥분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너나없이 셔먼호 파괴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 상황을 근거로 조선인들을 변호하면서 배상 청구의 부당성을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고종의 전폭적인 신임을 얻은 포크는 마치 조선총독처럼 행세했던 청국의 위안스카이에 맞섰으나 청국과의 관계를 유지와 셔먼호 배상 문제 저항에 내심 거부감을 갖고 있던 미국 정부에 의해 해임 통보를 받게 된다. 1887년 6월 29 결국 포크는 조선을 떠나 일본 나가사키로 떠난다. 

포크의 일화는 한때 미스터 선샤인라는 방송 드라마의 미군장교 역의 모델로  세간의 화제가 된 적도 있으나 드라마 내용과는 달리 일본으로 건너간 포크는 일본인 부인과 결혼해 무역회사 경영과 대학교수로 활동하다 1893년 37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유명을 달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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