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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커피커피로 읽는 인물 - 죽산 조봉암 (竹山 曺奉岩)

리디언스
2020-09-26
조회수 354


죽산 조봉암 (竹山 曺奉岩)


1959년 7월 31일 오전 11시 한 사형수에 대한 형 집행이 실시되었다. 간첩 혐의로 기소되었던 그는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음에도, 더우기 1심에서 불리하게 증언했던 사람이 기관의 강압에 못이긴 허위 자백이라고 밝혔음에도  2심에서는 사형이 선고되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52년이 지난  2011년 1월 대법원에서 열린 재심 판결에서는 무죄를 선고 받는다. 

공산주의자에서 전향하여 초기 이승만 정부의 농림부 장관까지 맡았던 사형수 ‘죽산 조봉암’ 선생의 혐의는 ‘간첩죄’였다. 이 사건을 두고 우리는 ‘진보당 사건’ 혹은 최초의 ‘사법살인’이라 부른다.




1898년 강화군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조봉암 선생은 1911년 강화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강화군청에서 근무하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여,  1년간 투옥되었다. 출옥 후 경성 YMCA 중학부에서 1년 학습했다. 그 뒤 일본으로 유학하여 아나키즘 계열의 단체 흑도회를 창설하였고 러시아로 건너가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공부하다 귀국하였다. 이후 조선공산당 창당을 주도하여 조직 중앙위원장을 맡았고 중국과 러시아를 오가며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혐의로 1932년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신의주 감옥에서 7년간의 옥고를 치루게 된다. 출옥후 일본경찰의 요시찰 대상으로 지목되어 대외활동이 금지되어 인천에서 은거하다시피 하며 생활하였다. 1945년 2월 외국과 비밀 연락을 취했다는 혐의로 일본 헌병대에 의해 검거되었다가 광복과 더불어 풀려났다.

해방후 그전부터 친했던 여운영의 도움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 활동을 시작하여 조선공산당, 민주주의민족전선 등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박헌영에게 조선공산당 지도부의 지나친 좌경화 행태에 대한 비판을 담은 편지가 언론에 공개되고 만다. 이 사건으로 박헌영과의 관계가 틀어지게 되어 조봉암은 결국 1946년 공식적으로 조선공산당과 결별, 우익으로 전향한다. 이후 온건한 사회민주주의자로 선회, 남한 단독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대한민국 초대 농림부장관을 역임하였다. 이 시기에 지주 세력이 중심 계층인 한국민주당의 격렬한 반대에도 비록 불완전한 형태였을망정 획기적인 농지개혁을 주도하게 되었다.



초대 내각 위원 ( 아랫줄 우측에서 두번째가 조봉암 초대 농림부장관 )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재선, 국회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 직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이승만 정부가 부산으로 도망하였음에도 조봉암은 서울에 남아 다른 국회의원들의 피난 비용을 마련해주고 중요한 공문서들을 폐기한 후에야 남쪽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이때 아내인 김조이는 함께 피난하지 못했고 결국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1952년 제2대 대통령 선거는 이승만에 의해 이른바 발췌 개헌으로 직선제가 실시되었고  조봉암은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79만여 표를 득표, 2위를 기록하였다. 1955년 조병옥, 신익희 등이 공산당 활동을 했던 조봉암의 입당을 반대하여 민주당 입당이 좌절되었다.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유엔 감시하 총선거를 통한 평화통일, 국민의료보장, 무상교육을 내세우면서 다시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이승만에 290여만 표 차이로 패배하고 만다. 

당시 조봉암 후보측은 이승만 측의 정치깡패의 방해로 인해 투·개표장에 참관인을 내지도 못하였고 부산의 한 선거구에서 조봉암 표를 이승만 표로 바꾸어 버리는 부정선거가 자행되었다고 한다. 이 두 번의 대선으로 결국 이승만으로부터 조봉암이야말로 그의 장기집권 계획을 흔들 수 있는 가장 큰 정적이 된다. 즉 추후 사법살인을 통해서라도 조봉암을 제거해야만 된다는 위기감을 갖게 된 것이다.








1956년 11월, 조봉암은 진보당을 창당하였으나 1958년 1월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체포되었다. 당시 1심 재판에서 ‘북한이 공작금을 보내 조봉암의 대통령선거 자금 및 진보당 창당 자금으로 지원했다’는 ‘양명산’의 진술이 있었음에도 무죄가 선고되었으나 2심에서는 결국  사형선고가 내려졌으며 1959년 2월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5개월 뒤인 1959년 7월 31일 교수형으로 집행되었다. 

이것이 바로 한국 현대사에서 최초의 사법살인이라고 일컬어지는 진보당 사건의 전말이다. 평화통일을 주장한 조봉암 선생의 진보적 정치관이은 공산주의 빨갱이로 치부되었고 그를 처형은 강력한 반공주의를 오로지 자신의 영구 독재의 발판으로만 삼았던 이승만 정권의 만행이었다.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하고서는 안 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하냐.

일본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한국의 독립을 쟁취해야 할 것은 물론이지만 한국이 독립되어도 일부 사람이 권력을 쥐고 잘 살고 호사하는 그런 독립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모든 사람이 잘 살고 호사할 수 있는 좋은 나라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공산주의자들이 그들의 사회질서를 억압과 공포로서 유지하고 있는 대신에, 우리 민주주의 진영에서는 명랑하고 활달한 정치를 지향함으로써 모든 국민이 민주주의 사회라고 하는 안식처를 스스로가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북의 괴뢰정권 김일성은 최근 박헌영 일파를 또한 같은 방법으로 죄를 뒤집어공산주의 씌워서 피의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들 자신이 더욱 민주주의 이념에 철저하고 민주주의 체제를 더욱 공고하게 함으로써 공산주의가 스며들 여지를 주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그가 내세운 조국의 자유독립과 평화통일, 국민의료보장, 무상교육은 당시 이승만 독재 정권의 입장에서는 급진 공산주의자라는 프레임을 씌워 희생시키에 더없이 적절했을 것이다.  좌.우 이념을 생각하기에 앞서 토지 개혁등과 같은 보편적인 사회 보장 시스템을 외치고 실천한 진정한 진보 정치인이으로서 국민 모두가 고루 잘 사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조봉암 선생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말들이다. 

2007년 9월 27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조봉암 선생을 중심으로 한 진보당 사건이 이승만 정권에 의한 반인권적 정치탄압이라 결론을 내리고 국가의 유가족에 대한 사과와 독립유공자 인정, 판결에 대한 재심 등을 권고하였다. 사형이 집행된 해로부터 무려 52년이 지난 2011년 1월 20일, 드디어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국가변란과 간첩 혐의에 대해  전원 일치의 무죄가 선고되어 복권되었다.

제물포구락부의 스페셜 블렌드 <죽산 조봉암>은 조국의 자유와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다 스러졌던 죽산 조봉암 선생의 꿈을 담았다. 무겁지 않은 바디감에 과일의 달콤함과 산미가 어우러져 누구나 마셔도 호의를 가질만한 커피다. 여운으로 느껴지는 풋풋한 흙내음이 마치 우리 땅의 대지를 연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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