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물포구락부 스토리 아카이브

재즈,어번스케치,3D모델링,여행가 그리고 남겨진 이야기.

읽는커피커피로 읽는 인물 -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Ernest Thomas Bethel)

리디언스
2020-09-12
조회수 131

펜으로 일제에 맞선 언론인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Ernest Thomas Bethel)

“의병장 이은찬 씨가 용산경찰서에 잡혔다가 경성지방경찰소로 넘어가서 감옥소에 체수함은 이미 게재하였거니와 재판소에서 심문할 때에 공초한 말을 들은즉 이씨의 말이 감개하고 기색이 늠름하여 왈, 내가 일인과 40여 차를 싸워 일병 470명을 죽였노라 하고 재판소 관리와 순사에게 대하여 조금도 굴함이 없고, 말할 때는 하대하며 또 말하기를, 나의 가진 돈이 200여 환이니 이 돈을 다 쓰는 날은 내가 죽는 날이라 차라리 주려 죽을지언정 이곳에서 공급하는 것은 먹지 아니하겠다 하며, 모든 죄수에게도 종종 음식을 사서 먹이고, 조금도 구축하는 일이 없다더라.” (대한매일신보, 1909년 3월 24일)


1909년 3월 당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게재되었던 기사의 일부다. 1909년 3월이라면 일제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1905년 11월)된지 이미 4년이나 지난 시기다. 따라서 당시의 사정으로 본다면 위와 같은 논조의 기사가 실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는 일본 당국은 ‘의병’과 관계된 사건 보도라 할지라도 ‘의병’이라는 표현을 절대 사용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검열했기 때문이다. 대신 ‘폭도’와 같은 용어로 표현하도록 강요했으나 대한매일신보는 언제나 의병으로 표현하였다. 일본 당국에 거의 유일하게 저항하던 언론이었다. 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인은 영국 출신 언론인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Ernest Thomas Bethel)’이었다.





대한매일신보를 발행한 영국인 베델(裴說 Ernest Thomas Bethell)은 1872년 영국에서 태어났다. 16세부터 32세까지 일본에서 무역상을 경영하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영국 <데일리 크로니클>이라는 신문의 특파원 자격으로 취재차 한국에 입국했다. 베델이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파원으로 보낸 첫 기사는 이른바 ‘경운궁(덕수궁) 화재 사건’이다. 베델은 기사를 통해 화재가 일본군의 방화일 가능성이 있다고 강력히 시사하였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베델은 이 기사로 인해 일본의 동맹국인 영국 언론답게 친일 기사가 필요했던 사측에 의해 사직당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대한매일신보는 언급한대로 베델을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독립협회 회원 출신으로 영어에 능통했던 양기탁을 총무로 하여  1904년 창간되었다. 창간 당시에는 6면 타블로이드판으로 영문 4면, 국문 2면으로 구성하였다. 1905년 8월부터는 순한글이었던 국문판을 국한문 혼용으로 바꾸었고 영문판을 ‘코리아 데일리 뉴스 (Korea Daily News)’로 분리하여 발간하기 시작했다. 1907년에는 순한글판으로 ‘대한매일신보’를 새로 발행하였다.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된 다음해인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서울에 통감부가 설치되었고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부임한다. 을사늑약이 맺어진 뒤 황성신문 에는 주필 장지연의 유명한 ‘시일야방성대곡’이 게재되었고 장지연은 연행되었으며 황성신문은 정간됐다. 

바로 그때 대한매일신보는 호기롭게 “실로 대한 전국 사회 신민의 대표가 되어 광명 정직한 의리를 세계에 발현하리로다. 오호라 황성 기자의 붓은 가히 해와 달과 더불어 그 빛을 서로 다투리로다” 라는 내용의 호외를 발행해 을사늑약을 폭로했다.  또한 민영환이 자결한 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의견 광고’를 싣는 등, 대서특필했다. 이 보도는 서울 시민들이 민영환 집으로 몰려가 대성통곡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후 헤이그 밀사 사건, 국채보상운동 등 대한제국의 국권과 관련된 사건을 적극적으로 알린 신문도 대한매일신보였다.

당시 대한제국은 명목상 독립 국가였으나 통감부와 일본 헌병대는 대한제국내 모든 신문에 대해 검열을 하기 시작했고 언론을 강력히 통제하였다. 하지만 대한매일신보에 대해서는 통제를 가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영국과 일본은 군사동맹 관계였고 치외법권 자격을 가진 베델이 발행인이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일본제국의 집요한 검열을 피하기 위한 방편이 된 셈이다. 대한매일신보는 또한 항일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의 본부이자, 국채보상운동 의연금을 거두는 중심 역할 또한 담당했다.  그런 이유로 고종도 자금을 제공하는 등 비밀리에 베델을 지원했다고 한다. 






한편 1907년 1월  순종의 결혼 축하 사절로 대한제국을 방문한 다나카 미스야키가 개성 교외의 경천사지 석탑을 무단으로 해체하여 일본으로 반출한 사건이 일어난다. 사건의 전말은 현장으로 달려가 직접 취재한 헐버트 박사에 의해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보도되었다. 이후 미국 뉴욕 포스트와 헤이그등 해외 신문에도 보도되면서 일본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게 된다. 결국 일본은 1918년 11월 경천사지 석탑을 서울로 반환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특별한 관리 조치 없이 방치되었다가 1960년에 한차례 복원 작업을 거쳐 2005년 재차 해체 복원 후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보관 전시되었다. 

베델과 대한매일신보의 이러한 활동은 일본의 입장에서 볼때 매우 불편한 것이었으므로 최대한 빠른 시일내에 폐간시키거나 아예 베델을 한국에서 추방해야 했다. 일본의 집요한 항의와 요구를 견디지 못한 영국 정부는 결국 베델을 두 번에 걸쳐 재판에 회부하였다.

첫 번째 재판은 1907년 10월 14일과 15일 이틀 동안 주한 영국 공사가 재판을 담당한 일종의 영사재판이자 약식재판이었다. 총영사 코번은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가 보도한 10건의 기사가  ‘소요를 일으키거나 조장시켜 공안을 해친 것’이라는 이유로 베델에게  6개월의 근신을 명하는 유죄판결을 내렸다. 

두 번째 재판은 상하이주재 영국 검사와 판사가 서울에 와서 1908년 6월 15일부터 19일까지 4일 동안 서울 덕수궁 옆 현재의 영국 대사관 자리에 있던 영국 총영사관에서 벌인 정식 재판이었다. 이 재판에서 판사 본은 베델에게 3주일간 상하이에서의 금고형을 선고하였고, 복역 후 6개월간 근신을 서약해야 했다. 또한 앞으로 베델이 계속 기사와 논설로 반란을 선동한다면 추방령을 내릴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결국 1908년 7월 총무 양기탁이 구속되는 등 일본의 집요한 탄압으로 베델은 사임하게 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베델은 1909년 5월 37세라는 젊은 나이로 사망한다. 사인은 심장비대증으로 알려졌으나 두 번에 걸친 재판과정과 상하이에서의 금고형 등 복합적인 요인이 겹쳐 건강을 해쳤을 거라고 추측된다. 양기탁에게 “나는 죽을지라도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동포를 구하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정작 대한매일신보는 1910년 경술국치 다음날 부터 ‘대한(大韓)’이라는 글자를 제외한 ‘매일신보’라는 제호로 총독부의 기관지로 전락하고 만다.





베델의 사망 후 그의 뜻을 영원히 기리는 비석을 세우기 위한 모금 운동은 아무런 광고 없이 시작되었으나 블라디보스토크 교포들의 성금으로 본격화 되어 대한매일신보의 이름 모를 독자들까지 참여하였다. 1910년 6월 완성된 한국식 비석 앞면에는 한자로 ‘대한매일신보 사장 대영국인 베델의 묘’라 쓰고 뒷면은 장지연이 지은 비문을 새겨 넣았다.


“아! 여기 대한매일신보 사장 베델 공(公)의 묘가 있도다. 그는 열혈을 뿜고 주먹을 휘둘러서 이천만 민중의 의기를 고무하며 목숨과 운명을 걸어놓고 싸우기를 여섯 해. 마침내 한을 품고 돌아갔으니, 이것이 곧 공(公)의 공다운 점이요 또한 뜻있는 사람들이 공을 위하여 비를 세우는 까닭이로다. (중략) 이제 명(銘)하여 가로되 드높도다. 그 기개여, 귀하도다. 그 마음씨여, 아! 이 조각돌은 후세를 비추어 꺼지지 않을지로다.” (원본은 한자이나 한글로 번역)


하지만 악랄하면서도 옹졸한 일본은 나중에 비문을 깎아 없애는 짓을 저지르고 만다. 훼손된 비문은 계속 방치되었고 1964년에 비로소 별도의 작은 비석에 다시 비문을 새겨 원래의 비석 옆에 세우게 된다. 베델의 묘와 비석은 현재 합정동의 양화진 외국인 묘원 입구의 나즈막한 계단 바로 위에 위치해 있는 A-2 구역에 모셔져 있다. 


제물포구락부의 스페셜 블렌드 <어니스트 토마스 베델>은 한국의 독립을 위해 펜 하나만으로 일제의 만행을 알린 언론인 베델에게서 영감을 얻었다. 잘 잡힌 밸런스와 바디감이 좋은데다 마시고 난 다음에도 길게 느껴지는 애프터테이스트가 인상적이다 . 깊고 풍부한 질감이 주는 부드러움은 좋은 일정으로 보내는 오후에 잘 어울린다.






2 0

연락처


주소:인천광역시 중구 자유공원남로 25

전화번호:032-765-0261

이메일:jemulpoclub@gmail.com

찾아오시는길


#제물포구락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