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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건축이야기이탈리아 공사관

아나스타샤
2020-08-01
조회수 205


분류 : 외교건축

건축년도 : 1901년 12월 개설, 1902년경 현위치 이전, 1908년 5월 서문외 미국선교사 쓰레와트가옥으로 재 이전

소재지 : 서소문동 41번지 


조선과 이탈리아 사이에 외교관계가 성립되는 과정은 여느 나라와는 다르게 여러모로 순탄하지 못하였다. 

조약의 체결은 일찍이 1884년에 성사되었던 것에 반해 외교공관의 설치는 정작 17년이라는 세월을 넘긴 1901년에 와서야 겨우 실행되었던 까닭이다.

일본과의 병자수호조규(강화도조약; 1876년) 이후 우리 나라와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서구열강의 대열을 통틀어 이탈리아는 결코 그 순서가 뒤지지 않았다. 미국(1882년), 영국(1883년), 독일(1883년)보다는 약간 늦지만 러시아(1884년), 프랑스(1886년), 오스트리아(1892년), 청국(1899년), 벨기에(1901년), 덴마크(1902년)보다는 그 시기가 훨씬 앞섰다. 

여타의 각국 공사관이 주로 정동 안쪽에 밀집되었던 것과는 달리 이탈리아 공사관은 이보다 약간 벗어난 서소문 방면에 자리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두 곳은 각각 공사관 거리(Legation Street)와 이탈리아 공사관 거리(Italian Legation Street)로 따로 구분하여 불렀다. 

이탈리아 공사관 거리는 곧 지금의 서소문로를 말한다.

그런데 어느 시점엔가 이탈리아 공사관 건물은 약간의 변화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카를로 로제티의 책에 소개된 사진자료에는 애당초 기와지붕을 올린 서양식 2층건물에다 정면에서 보았을 때 5칸의 창문을 지닌 구조였으나, 을사조약 이후에 발행된한국명소(韓國名所) 시리즈에 포함된 '이태리영사관(伊太利領事館, 1909.8.8일자 우편소인이 찍힌 개인소장자료) 사진엽서에는 좌측으로 창문 3칸이 더 증축된 상태로 변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부분 역시 관련자료의 보완이 필요하다 하겠으나, 아쉽게도 더 이상의 자료는 잘 찾아내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이른바 '을사조약' 이후의 이탈리아 공사관은 어떻게 변하였던 것일까?

가장 큰 변화는 일제에 의한 외교권의 박탈로 기존의 각국 공사관이 일제히 영사관으로 격하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서울 육백년사> 제4권 (1981)과 같은 자료에서는, "이태리 공관에 관한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고 있어 타국과는 달리 을사조약 당시 공관을 철수한 후 폐쇄된 것 같다"고 서술하고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탈리아도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공사관은 철수하였으나 '영사관'만큼은 계속 유지하는 정책을 사용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영사관과 공사관 시절을 다 협쳐도 10년을 넘기지 못한 사이에 두 명의 이탈리아 영사가 이 땅에서 목숨을 다 한 것은 분명 특기할 만한 사항이다. 그들의 흔적은 양화진 언덕에 묘비와 무덤으로 고스란히 남아 전해지고 있으니, 두 나라 사이에 그것보다 더 끈끈하고 인상적인 인연은 찾기내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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