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물포구락부 스토리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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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볼 수 없던 이야기. 이젠 그 얘기를 해드릴게요.


읽는커피커피, 문학에 반하다.

리디언스
2020-02-08
조회수 33

지난여름은 유래 없이 더웠다. 헉헉 소리가 절로 나오게 하는 열기와 습도는 인간이 수많은 생물 중 가장 완전한 상태로 환경에 적응한 존재라고 주장하는 진화론의 근간인 자연선택설(自然選擇說)의 입지를 의심케 했다. 한편으로는 SF 소설에나 등장하는 재앙에 대한 예고가 사실은 음모가 아닌 현실일 수도 있다는 합리적인 의심을 하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이 단지 기상 이변이 아니라 상시화의 조짐이라면 선풍기와 에어컨이야말로 조만간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제치고 현대인이 만들어 낸 문명의 이기 목록의 맨 위 지위를 차지하지 않을까? 이쯤 되면 단지 강렬한 태양 때문에 살인을 저질렀다는 알베르 카뮈(Alberto Camus)가 쓴 소설 <이방인> (L'Étranger) 의 주인공 뫼르소의 살인 동기가 이해가 될 법도 하다. 

소설 <이방인>의 작가 알베르 카뮈는 1913년 당시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1차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전사하는 바람에 청각장애자이면서 남의 집 가정부로 일했던 어머니와 가난하게 성장했다. 소설 <이방인>을 필두로 <시지프의 신화>, <페스트>, <반항하는 인간>, <전락> 등의 작품을 써 오다 195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으나 3년 후 파리로 향하던 길에 그가 평소 가장 ‘부조리한 죽음’이라고 일컬었던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생전의 카뮈에게는 실존주의 철학을 대표하는 작가로서의 지위를 받았으나 정작 카뮈 자신은 “실존주의가 끝난 곳에서 나는 출발하고 있다”고 부정한 바 있다. 1942년에 발표한 작품 <이방인>은 그의 출세작이자 문제작이다. 부조리로 가득 찬 세상에 대하여 침묵의 반항으로 일관하는 주인공 뫼르소를 통해 그럼에도 인간 스스로가 삶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을까.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받았다. ‘모친 사망. 내일 장례 예정. 삼가 애도함’ 이걸론 알 수 없다. 아마 어제였겠지. (열린책들 13p)


<이방인>은 한마디로 죽음에 관한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엄마의 사망을 알려주는 전보 한통으로 시작하여 자신이 저지른 살인과 살인죄의 형벌로 받은 사형집행을 예고하는 것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1부는 사건이 중심이다. 엄마의 죽음부터 시작하여 장례식, 연인 마리와의 연애, 친구 레몽과 그의 애인간의 불화, 이에 연유한 주인공 ‘나’의 아랍인 살해에 이르기까지의 연이은 사건들이 골격을 이룬다. 그에 반해 2부는 살인 혐의로 체포 된 후부터 재판 과정,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순간까지를 다루었다. 


주인공 뫼르소는 상식이라 일컫는 보통의 시각으로 본다면 매우 이상한 사람이다. 엄마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관례화된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으로 비쳐진다. 그런 면에서 뫼르소의 인물 성격은 제목처럼 ‘이방인’이다. 이방인이라는 의미 속에는 사회에서 그를 이방인으로 보는 것과 그가 스스로 자기 자신과 사회를 낯설게 보는 것 두 가지가 모두 해당된다. 엄마 장례식에서의 그와 법정에 앉아 있는 그는 자유를 누리는 자와 자유를 소박당하는 자라는 차이만 있을 뿐 자기 자신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실존’으로서의 인간이라는 위치는 동일하다. 그렇다면 뫼르소가 사형을 언도 받은 근본적인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단지 살인을 저질렀다는 죄목이었을까? 그것보다는 어쩌면 엄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다는 것과 엄마의 시신 보기를 거부 했고, 담배를 피우며 밀크 커피를 마신 냉혈한 인간이라는 굴레 때문은 아니었을까? 거짓 없는 자신을 드러냄이 부조리(不條理)로 가득 찬 세상에서 오히려 부조리한 존재로 전락하게 된 것은 아닐까? 지루한 법정에서의 심문과 공방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죄에 대한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그는 자신의 진짜 ‘죄’를 자각한다.


그는 내가 엄마를 보려하지 않았고 담배를 피웠으며 잠을 잤고 밀크 커피를 마셨다고 했다. 그러자 장내 전체에 어떤 술렁임이 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처음으로 내가 죄인임을 깨달았다. (열린책들, 127p) 


그런 시각에서라면 그는 더욱이 엄마의 장례식 다음 날 해수욕을 하고 코미디 영화를 보고 연인과 정사를 나누는 냉혈한 패륜아다. 그가 보인 일련의 행동들은 그가 계획적으로 아랍인을 살해 했다는 정황을 노골적으로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았다는 건 다분히 냉소적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알베르 카뮈의 사진은 세상을 조롱하는 듯 옅은 미소를 띤 채 담배를 물고 있는 모습이다. 그는 평소 담배와 함께 커피를 즐겼다. 특히 19세기 말에 생겨난 프랑스 파리 ‘셍제르멩데프레’ 성당 근처의 ‘카페 레 되 마고’에서 사르트르와 셍텍쥐페리, 헤밍웨이, 피카소 등의 문화 예술인들과 커피를 마시며 예술과 사상을 논하며 <이방인>을 집필했다고 알려져 있다. 조금 비약해서 말하면 카페와 커피가 알베르 카뮈와 그의 문학, 특히 <이방인>을 만들어 냈다고도 할 수 있다.


‘카페 레 되 마고’와 같은 유서 깊은 카페의 역사는 곧 프랑스 커피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 프랑스 커피의 역사는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644년 항구도시 마르세유를 통해 공식적으로 처음 커피를 수입되었다. 당시엔 수입항 마르세유를 중심으로 소비되었다가 1669년에 이르러서야 파리에 소개 되었다. 재밌는 건 그 과정에서도 ‘이방인’이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당시 오스만 제국의 파리 주재 외교관 술레이만 아가(Suleiman Aga)는 저택을 빌려 관저를 꾸몄고 파리의 사교계 인물들을 초청해 당시로서는 ‘신문물’이었던 각종 이국적인 물건들을 선 보였다. 커피는 그 중에서도 특별한 인기를 얻은 물건이었다. 급기야 파리 귀족들 사이에서는 아가의 저택에 초청 받아 커피를 마시는 것이 첨단 유행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이러한 현상은 당연히 아가의 저택에서 뿐만 아니라 커피를 자유롭게 마실 수 있는 전용 공간 즉, 카페의 등장을 불러왔고 1672년 드디어 술과 커피를 동시에 판매하는 카페가 생겼다. 그러나 커피만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카페’는 1686년에 개장한 ‘카페 프로코프’라 할 수 있다. 18세기에 이르러 ‘카페 프로코프’는 볼테르와 루소, 디드로 등 계몽주의 사상가들뿐만 아니라 나폴레옹도 청년 시절 자주 드나들었다고 알려졌으며 이후 ‘카페 레 되 마고’는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카뮈를 비롯한 벨르렌과 랭보 등의 문인들이 단골이었다고 한다. 이밖에도 ‘카페 드 프로르’, ‘카페 드 라페’등 유명 카페들이 연이어 문을 열만큼 커피는 일찍부터 프랑스 시민들의 애용품이 되었다. 


프랑스의 커피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사건은 단연 프랑스 대혁명이다. 카페 프로코프가 프랑스 대혁명의 이론적 장이 되었다면 ‘카페 프와’는 혁명의 첫 발자국을 내 디딘 실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1789년 7월 역사적인 프랑스 대혁명 당시 카페 프와의 탁자 위로 올라간 카미유 데물렝(Camille Desmoulins)은 왕과 귀족들에 대항하여 무장할 것을 촉구하고 혁명가 일행과 함께 바스티유로의 행진을 시작했다. 당시의 ‘살롱’이 부르주아 계층만이 입장할 수 있었던 귀족적, 엘리트적 시설이었던 것에 반해 카페는 커피 값만 지불하면 누구든 드나들 수 있었던 열린 장소였다. 바로 평등과 공화주의의 상징이 되었던 것이다. 런던의 커피 하우스가 ‘공론장’으로서의 역할이 컸던 만큼 파리의 카페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양한 계층의 모임 장소로 활용되었던 것만큼 계몽사상과 혁명의 장소적 단초가 되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역사적인 유래가 있어서인지 프랑스 국민들의 커피 사랑 또한 각별하다. 프랑스 커피 메뉴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카페 오레(Café au Lait)’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커피에 우유를 섞은 것이다. 커피에 우유를 섞은 것이라면 쉽게 ‘카페 라떼(Caffe Latte)’를 떠올릴 수 있지만 카페 오레와 카페 라떼는 전혀 다른 메뉴라 할 수 있다. 이탈리아식 메뉴인 카페 라떼가 진하게 추출한 에스프레소에 스팀을 이용하여 거품 낸 우유를 올리는 것인데 비해 프랑스 스타일인 카페 오레는 커피 플런저라고도 불리는 프렌치프레스나 핸드드립으로 진하게 내린 커피에 단지 따듯하게 데운 우유를 부어 만든다. 프랑스에서는 아침 식사용으로 애용하고 있다고 한다. 커피 본연의 맛 보다는 우유 맛의 특징이 더 또렷하게 나타나기에 우리나라에서는 커피 전문점 등에서 판매되기 보다는 가정에서 편의성에 의해 즐기는 메뉴다.  


한편,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엄마의 빈소에서 담배를 피우고 수위가 가져다 준 ‘밀크 커피’를 마신다. 당시의 양로원 수위가 커피에 거품을 낸 스팀 밀크를 얹어 가져다주었을 리는 만무하니 아마도 카페 오레에 근접한 커피가 아닐까 추측한다.  


엄마의 시신이 잠들어 있는 빈소에서 담배를 피우고 커피를 마신 뫼르소의 행동은 확실히 생경하다. 나아가 특별한 이유도 없이 아랍인을 죽인 것보다 오히려 더 낯설게 보이기도 하다. 그러나 소설 곳곳에는 진정 뫼르소가 엄마의 죽음에 무덤덤하고 아랍인을 죽인 것에 아무런 죄책감을 갖지 않는 냉혈한이었는지에 의문이 가는 대목들이 숨어 있다. 예컨대 아내가 죽은 후 오랜 시간 개를 키워 온 살라마노 노인이 겉으로는 개를 학대하는 듯 행동했으면서도 정작 개를 잃고 나서는 침대가 삐걱거릴 정도로 울고 있다는 알았을 때, 뫼르소는 죽은 엄마를 생각했다. 물론 ‘그때 왜 엄마 생각이 났는지 모르겠다’고는 했지만.


말하자면 엄마의 죽음에 대하여 단지 눈물을 흘리고 비통의 표정과 행동으로 표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계획적인 살인 의사를 품을 수 있는 흉악한 인간일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는 준거가 된 것이다. 결국 부조리한 세계에서는 부조리한 세계에 함몰하지 않은 주체적인 인간이 곧 ‘이방인’이란 사실을 알려 주고 있다. 자신의 삶에 솔직함으로서 노예가 아닌 주인으로 온전히 서는 인간이 역설적으로 ‘부조리’한 세상에 ‘부조리’를 저지르게 되는 셈이다. 안타깝게도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서야 뫼르소에게 주어진 탈출 방법이란 결국 사형을 당하는 ‘죽음’일 수밖에 없었다는 걸 알려준다.


‘나는 아주 오랜만에 처음으로 엄마 생각을 했다. 어마가 어째서 인생의 끝에 다다라 약혼자를 갖게 되었는지, 그리하여 어째서 다시 모든 걸 시작하는 듯한 장난을 받아들였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었다. 거기서도, 그러니까 이제 차츰차츰 생들이 꺼져가는 그 양로원 주변에서마저도 역시 저녁은 애수 어린 휴식의 시간 같았지. 그처럼 죽음에 가까이 이르러서 엄마는 자신이 자유롭게 해방되어 있으며, 따라서 다시 모든 것을 살 준비가 되어 있다고 느꼈음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아무에게도, 진정 아무에게도 엄마에 관해 울 권리가 없다. 그리고 나는, 나 또한 엄마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다시 살 준비가 되어 있음을 느꼈다. 좀 전의 거대한 분노가 내 속의 악덕을 씻어 내고 희망을 비워 낸 것이기라도 하듯, 나는 기호들과 별들로 가득한 밤 앞에 서서 처음으로 세상의 애정 어린 무심함에 나 자신을 열었다. 세상이 그처럼 나와 닮았다는 것을, 요컨대 그토록 형제 같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나는 내가 행복했으며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열린책들, 17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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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까뮈.. 어떤 영화배우보다 잘생김요....-_-;; 지금도 그렇지만 참으로 편견많고 남 시선 의식하면서 살아야하는건 동서양을 막론했네요. 가식이 넘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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