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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커피커피로 읽는 인물 -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리디언스
2021-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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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네 번째 민족대표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석호필’은 한때 영화 프리즌 브레이크의 주연이었던 배우 웬트워스 밀러(Wentworth Miller)를 일컫는 한국식 이름이었다. 하지만 ‘석호필’이라는 이름의 진짜 주인공은 따로 있다.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의  212분 중 유일한 외국인이 계시다. 그가 바로  3·1운동 민족 대표 33인에 더해 34번 째 민족대표 라 불리는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다. 캐나다 출신 수의사로 1916년 8월 세브란스에 세균학 교수로 부임한 스코필드는 1919년 3·1 만세운동에 참여하면서 그 해 4월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현 화성시 향남읍)에서 일어난 제암리 학살사건을 세계에 알린 장본인이다. 또한 3.1 만세운동 당시 탑골공원에 모인 군중들이 흔들던 태극기 사진들의 대부분을 그가 찍었다.

그의 한국 이름이 바로 석호필(石虎弼)이다. 석호필의 한자는 각각 돌 석(石), 호랑이 호(虎), 도울 필(弼)이다. 돌처럼 굳은 마음으로 호랑이처럼 강하게 한국을 돕겠다는 의지를 담은 셈이다. 그래서 그의 별명 또한 ‘호랑이’다.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1889 ~ 1970) (사진 : 시사저널)





스코필드 박사와 부인 앨리스 (사진 : 독립기념관)



윌리엄 스코필드는 1889년 3월 15일 영국 워릭셔(Warwickshire) 럭비(Rugby)에서 4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고등학교를 마치고, 농장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1907년 홀로 캐나다 토론토로 이주하여 농장에서 일하면서 토론토 대학교 온타리오(Ontario) 수의과 대학에 들어갔으나 1910년에 소아마비를 앓게 되면서 지팡이를 짚게 된다. 1911년 세균학 박사학위를 받으며 졸업한 후 1913년에 결혼, 1914년부터 모교에서 세균학을 강의했다. 1916년 당시 한국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 교장으로 있던 에비슨(Avison, O. R.)의 초청으로 한국에 선교사 자격으로 들어와 세균학 교수로 근무하였다.

스코필드는 1919년 초 3.1 만세운동에 영향을 주었던 ‘민족자결주의’를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표방할 것이라고 민족대표 33인 중 하나인 이갑성(李甲成)에게 전했으며 3·1 만세운동 직전 협력을 요청 받았던 외국인으로서는 유일한 사람이다. 이갑성은 하루 전날인 2월 28일 스코필드를 찾아와 독립선언문을 영어로 번역하여 미국 백악관에 보내 줄 것을 요청하고, 3월 1일 오전에는 파고다 공원에 오후 2시까지 와서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했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3.1운동 초기 현장 사진들은 이때 스코필드가 자전거를 타고 찾아가 찍은 사진들이 대부분이다. 스코필드는 이 사진들을 이용해 3.1 만세운동의 실상을 해외에 알렸다. 또한 일제의 비인도적 한국인 탄압에 대하여 항의하고, 언론에 투고하는 등의 방법으로 폭로하였다. 그리고 외국인의 신분을 이용하거나 일본 경무국장과의 친분관계를 도용하여 피해를 당하는 학생들을 상당수 구출하기도 했다.




3.1 만세운동 당시 덕수궁 앞에서 벌어진 시위 모습 (사진 : 독립기념관)



제2의 3·1운동이 일어나던 그해 4월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현 화성시 향남읍)에서 일본 군경이 조선인 23명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일본군은 만세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마을 주민들을 제암리 교회에 모이도록 하였고 문을 잠근 후 총을 난사하고 방화하여 26명의 양민을 학살하였다. 이 사건을 들은 스코필드는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자전거를 한쪽 다리로만 타야 하는 불편한 몸으로 수원에서 제암리까지 몰래 잠입, 만행 현장을 촬영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때 만든 <제암리의 대학살(The Massacre of Chai-Amm-Ni)>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는 중국 상하이에서 발행되던 영자신문 <상하이 가제트(The Shanghai Gazette)> 1919년 5월 27일자에 서울 주재 익명의 특별통신원(Special Correspondent)이 4월 25일 보내온 기사로 실렸다. 이로써 제암리 학살 사건이 해외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화재로 소실된 제암리 민가. 사진 : 국민일보



불타버린 제암리 교회. 사진 : 월드뷰




일제의 만행을 담은 스코필드의 사진들은 이밖에도 상해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에도 실리고, 영문 사진첩 『한국 독립운동(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1919)에도 실렸다. 특히 서울주재 미국총영사 베르그홀츠에 의해 미국무장관에게 보고되기도 하였다.

한편 일본이 한국에서 행하는 선행을 홍보하기 위한 어용 영자신문 <Seoul Press>에 무기명으로 일본의 만행을 고발하기도 했다. 또 알려지기로는 기차안에서 만난 이완용(李完用)이 “어떻게 하면 기독교 신자가 될 수 있소?”라고 묻자, “이천만 국민에게 사죄해야 될 수 있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또한 서대문형무소, 대구형무소 등을 다니며 만세운동 관련 수감자들을 찾아 위문하였다. 이때 만난 독립운동가 중에는 유관순 열사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스코필드가 독립운동에만 관여한 것은 아니다. 바로 백신 연구다. 1918년 세계적으로 유행한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가 한반도에도 상륙하자 환자의 증상을 관찰해 기록으로 남겼고 미국 의학회지에 ‘한국에서 발생한 판데믹 인플루엔자, 사례와 병인(病因)’이란 제목으로 실리기도 했다. 당시 한반도의 스페인 독감 유행 상황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의학 논문이다.  또한 여기에 그치지 않고 백신 개발을 위해 환자 20명의 가래를 모아 분석했지만 아쉽게도 최종 개발로 이어지진 못했다. 

그러나 결국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조선총독부 당국에 의해 1920년에 강제 출국을 당하게 되었다. 이후 캐나다로 귀국하여 대학교수로 활동하다가 1958년 한국에 귀국하여 서울대 수의대 교수로 복귀하였다. 1960년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받았고, 1968년에는 ‘건국공로훈장’을 받았다. 1968년 건국공로훈장을 받을 당시 한국 땅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이에 따라 1970년 외국인 최초로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1970).



국립 현충원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의 묘. 사진 : 서울신문




스코필드는 어린 중·고등학생들에게 영어 성경을 가르치면서 존칭을 생략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또 개인의 사비를 털어 장학금을 만든 것도 모자라 남은 재산 마저 서울 보육원 두 곳과 YMCA에 헌납했다고 한다. 

한국을 실천적으로 사랑했던 그의 삶이 주는 교훈은 상당하다. 불편한 신체를 무릅쓰면서 일제의 학살 만행 현장을 고발했으며 늘 약자를 배려했고 한국인을 자신의 동포처럼 사랑했다. 생을 마치면서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며 헌신한 스코필드의 별명이 왜 호랑이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서도 말년에 누군가 "호랑이 할아버지!" 라고 부르면 "이젠 호랑이가 아니에요. 고양이밖에 못 돼요" 하며 웃으면서 농담을 했다고 한다. 따뜻한 인간미가 더해진 호랑이다운 강직함을 가졌던 스코필드야말로 진정으로 정의로운 의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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