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물포구락부 스토리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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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건축이야기제물포구락부의 공간들

리디언스
2020-07-19
조회수 807

제물포구락부의 공간들


제물포구락부는 단순히 근대문화유산으로서만 존재하는 공간성을 뛰어넘는다. 개항장의 상징적 서사 자원으로서의 역할뿐 아니라 다양한 문화적 체험이 가능한 곳이기도 하다. 

인위적 구획이 아닌 자연스럽게 구분된 오밀조밀한 공간의 활용성과 자체의 아름다움을 느껴보는 것도 제물포구락부가 가진 색다른 즐거움이다.



헐버트 홀

 


제물포구락부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며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공간이다. 다용도로 활용할 수 있는 대형 우드슬랩 테이블과 각종 정보를 한눈에 보며 검색할 수 있는 키오스크, 인문 예술 역사 관련 도서 위주로 큐레이션된 서가, 제물포구락부만의 특별한 기념 엽서에 메시지를 담을 수 있는 조그만 윈도우 사이드 테이블이 있다.


“새롭게 단장한 제물포클럽 개회식을 6월22일(토요일) 오후 4시30분에 가졌다. … 모두 건물 내부의 멋진 방과 시설들을 둘러본 후, 영국 영사인 허버트 고페씨가 훌륭한 서비스를 언급하고 클럽 빌딩에 관해 설명을 해주었다. … 대단한 감격 속에서 새로운 이 사업을 위해 모두 축배를 들었다. … 클럽 건물은 좋은 전망에다 넓은 당구장과 독서실, 그리고 근처에 테니스장을 갖추고 있어 성장하는 제물포 사회의 색다른 장식을 선사했다. 클럽 건물이 오래도록 물결치듯 활동하기를!” (호머 베절릴 헐버트 Homer Bezaleel Hulbert)


일제의 압박으로부터 한국의 자주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푸른 눈의 애국지사 호머 베절릴 헐버트가 남긴 제물포구락부의 1901년 당시 개소식 기록이다.  

얼핏 들으면 제물포 거주 외국인 전용 클럽 개회식을 축하하는 단순하고도 관례적인 메시지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헐버트는 고종의 최측근으로서 외교 전략 자문역을 담당했던 전략가였다. 그러한 그의 행적을 미루어 본다면 마치 고종이 청,일의 외교적 간섭으로부터 탈피할 목적으로 ‘정동구락부’를 이용한 사례에서 보듯이 일제의 압박을 견제할 정략적 수단으로서 제물포구락부를 거론한 것이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추측도 가능하다. 제물포클럽 건물이 오래도록 물결치듯 활동하기를 염원했던 헐버트의 소망을 담아 이름지었다.





윈도우사이드 테이블



헐버트 홀 우편 창가의 아담한 사이즈의 우드슬랩 테이블이 놓여 있는 공간이다.

제물포구락부의 주요 컨텐츠인 ‘읽는커피’를 주제로 한 일러스트 엽서와 만년필, 잉크가 비치되어 있어 방문 기념 메시지를 남길 수 있다. 이는 제물포구락부가 의미하는 역사성, 장소성에 시민들의 기록이 함께 한다는 의미가 있다. 내용 공개에 동의해 주신 시민들의 메시지는 향후 전시 또는 아카이빙 과정을 통해 기록, 보존할 예정이다. 





제물포구락부의 서재



인문, 예술, 역사, 위주로 특별히 큐레이션한 각종 도서가 빽빽하게 비치되어 있다. 누구든 자유롭게 열람하여 우드슬렙 테이블에서 읽을 수 있다. 현재는 300여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향후 신간 위주의 지속적인 추가 입고로 지역 시민들을 위한 작은 도서관의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셔우드 로제타 홀 룸



헐버트 홀을 둘러보다 자연스럽게 들어서게 되는 아담한 방이다. 1890년 의료선교사로 처음 조선에 온 후 ‘광혜여원’을 비롯한 여러 의원을 개원하며 헌신한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을 기념하는 공간이다. 로제타 셔우드 홀은 조선에서의 1890~1891년까지의 일들을 6권이나 되는 방대한 일기로 기록했다. 개인적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사료로서의 가치도 뛰어나다.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씰을 발행한 ‘셔우드 홀’이 그의 아들이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주인공 ‘윈스턴’은 발각될 경우 사형 혹은 25년의 강제노동형에 처할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일기를 쓴다. 기록은 오로지 빅브라더의 당이 지배하고 관장하기 때문이다. 윈스턴은 어느 순간 누구를 위해 일기를 쓰는지 자문한다. 특정할 수는 없지만 어렴풋하게 미래를 위해, 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세를 위해 기록한다는 자각을 한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


어느 카메라 업체의 광고 카피다. 카피가 의미하는 것처럼 기억이란 기록으로서 더욱 명료하게 보존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왜곡된 기록이 사실로 둔갑할 수 있는 섬찟한 모순도 성립된다. 일본에 의한 역사 왜곡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므로 기억하기 위해서는 기록이 필요하고 기록은 정확해야 한다. 이렇게 기록된 역사는 기억을 재생하고 재생된 기억은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디딤판이 된다. 이는 또 ‘미래 세대를 위한 가치 재생’이라는 제물포구락부가 추구하는 비전과도 부합한다. 

한편 로제타(Rosetta)는 1799년 프랑스 나폴레옹 군이 발견되어 고대 이집트 상형 문자의 해석에 중요한 기반이 된 비석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집트인이 기록했지만 식민제국주의 국가인 프랑스와 영국의 침탈 과정을 거쳐 현재는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기록과 보존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기 위해서는 과연 어떠한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지 그 중요성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메켄지 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보았을 법한 사진이다. 남루한데다가 통일마저 되어 있지 않은 복장에 총과 칼을 들고 있는 12명의 남자들이 사뭇 비장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이 사진은 1907년 대한제국 시절 경기도 양평 지역에서 항일 무장 투쟁을 벌였던 의병들의 실제의 모습이다. 당시 종군 기자의 신분으로 대한제국에 주재하고 있던 프레더릭 아서 매켄지(Frederick Arthur McKenzie)가 직접 찍은 사진이다.

메켄지는 1907년 일본의 대한제국 군대 해산에 반발해 전국 곳곳에서 일어난 항일 의병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그의 책 <대한제국의 비극>에 담았다. 이밖에 <베일을 벗은 동양>(1907)을 통해 한국인은 일본의 통치를 반대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의 독립운동 Korea's Fight for Freedom>은 항일 독립 투쟁을 당시 외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들은 사실 그대로 기록하고 알린 책이다. 또한 3.1 독립선언서의 영문번역문을 싣는 등 외국인 기자로서의 한계를 넘는 활동을 보여주었다. 우리로서는 매우 고마운 은인이다.




그의 이름을 담은 ‘메켄지 홀’은 평소 좌담을 나눌 수 테이블과 부속 의자 등이 놓여 있으나 특별한 경우에는 공연과 발표회 등을 위한 무대와 객석으로 충분히 활용된다. 다수의 시민들을 수용할 수 있는 각종 인문학 강좌 진행도 이루어질 예정이다.

 

 



김란사(金蘭史) 바(Bar)



김란사는 조선 최초의 여성으로서 유학생이다. 1895년 관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게이오기주쿠에서 1년간 수학하였고 1897년 11월 샌프란시스코 항을 통해 미국에 입국, 1900년 오하이오주 웨슬리안대 문과에 입학하여 1906년 문학사 학위를 받는다. 하지만 김란사의 삶을 단순히 조선 최초의 여성 유학생이라는 수식어로 설명하기에는 너무나도 미흡하다.


“지금 내인생과 조선의 운명이 꺼진 등불처럼 깜깜합니다. 제게 빛을 찾아주시지 않겠습니까?”

 

1907년부터 김란사가 조직하여 지도했던 이화학당 학생 자치단체인 이문회는 후일 유관순이 민족의식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1919년 파리국제강화회담에 비밀 파송되기 위해 왕의 비밀문서를 품고 떠났다가 경유지인 베이징에서 독살 당한 여성 항일 투사이기도 하다. 한국의 독립과 여성해방을 위해 스스로 불꽃이 되기를 자처했던 여성독립운동가로서의 다각적인 연구와 재인식이 필요하다. 

제물포구락부의 상징이기도 한 바(Bar)의 이름을 ‘김란사 바’로 정한 것은 굉장히 역설적인 이유가 숨어 있다. 비록 김란사의 삶이 고난과 투쟁, 혁명으로 점철되어 있다고는 하나 분명 섬세하고 아름다운 심성의 소유자였을 것이다. 모든 투쟁은 결국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 유학생이기도 했던 김란사인 만큼 서양식 바(Bar) 또한 전혀 어색한 조합은 아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솔직히 개인적 삶을 포기하고 오직 대한의 독립과 여성해방을 위해, 사회 개혁을 위해 헌신한 것에 대한 연민이 가장 큰 이유일 수도 있다. 





베버홀



제물포구락부 1층은 1901년 완공 당시 건물 전체를 지탱하고 있는 석벽(石壁)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 갤러리로 활용되어 <제물포시대전>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본격적으로 작품들을 감상하기 전 대하게 되는 방이다. 갤러리 투어 도중 잠시 숨을 고를 수도 있다.


카톨릭 신부인 노르베르트 베버(Norbert Weber)는 1911년 2월부터 5월까지, 1925년 5월부터 9월까지 각각 한국을 방문했다. 이를 계기로 1915년 <고요한 아침의 나라>, 1927년 금강산 여행기인 <수도사와 금강산>을 출간했다. 이중 <고요한 아침의 나라>는 화가이기도 한 베버의 그림이 수록되어 있기도 하다. 흥미로운 점은 중국과 일본의 회화에 비해 한국의 회화가 뛰어나다고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베버의 또 다른 책  <수도사와 금강산>은 1925년 금강산을 다녀온 후 쓴 여행기다. 이 책에서도 역시 금강산을 담은 일본화가의 작품과 한국화가의 작품을 비교하고 있다. 기교와 채색이 뛰어난 건 일본화가의 작품이나 금강산의 위용과 특색을 더욱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은 한국화가의 작품이라고 적고 있다. 


그가 1925년 금강산 여행 당시 외금강 온정리의 숙소에서 발견하여 구입한 화첩속에는 겸재 정선의 금강내산전도(金剛內山全圖)가 포함되어 있다. 화가이기도 한 베버가 겸재의 작품을 알아본 안목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로웰 룸



한국이 오래전부터 ‘조용한 아침의 나라’로 불리게 된 연유는 <내 기억속의 조선, 조선 사람들>이라 번역된 책 덕분이다. 원제는 <Chosön the Land of Morning Calm>(1885)이며  제목 그대로 '조선,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는 책이다. 룸 이름의 주인공 이기도 한 저자 퍼시벌 로렌스 로웰(Percival Lawrence Lowell, 1855~1916)은 그야말로 한국을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고 일컫게 해 준 장본인이다. 

들어서게 되면 누구든지 나지막한 탄성을 낼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공간이다. 어떤 작품이 걸려 있다 해도 늘 침묵과 정적, 고요가 함께한다. 한마디로 방 속의 방이다(Room in Room).





석남 이경성 극장




한국 최초의 공립박물관인 인천시립박물관의 초대 관장 ‘석남(石南) 이경성(李慶成)’(1919~2009) 선생은 1953년 4월 현 제물포구락부에 박물관을 재개관하면서 서울 미 공보관에서 영사기와 책을 빌려와 시민들이 자유롭게 읽을 수 있도록 비치하는 한편 창고로 사용하던 당시의 제물포구락부 1층을 개조하여 시민들을 위한 무료 영화관을 열었다. 정상적인 운영조차 어려운 여건이었던 시립박물관이 전쟁으로 황폐해진 시민들을 위한 도서관과 영화관의 역할까지 수행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미담이다. 

평소에는 갤러리 공간으로 사용하나 이경성 선생을 유지를 이어 영화 상영과 해설이 있는 재즈 감상회등을 진행하는 공간으로도 활용 예정이다. 특히 석벽 공간이 주는 공간성으로 인하여 공명과 잔향 효과가 뛰어나다. 마치 동굴에 들어온 느낌인양 쉽게 경험하기 어려운 동굴사운드를 체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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