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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커피커피로 읽는 역사 - 아편전쟁 (1840~1842)

리디언스
2020-05-31
조회수 177

커피로 읽는 역사 - 아편전쟁 (阿片戰爭) 


차와 커피는 기호품이자 쌍방 대체품이다. 다시 말하면 차든 커피든 수급이 원할치 않는 경우  어느 한쪽의 소비량을 늘려 대체할 수도 있거니와 최악의 경우라 해도 먹지 않으면 그만이다. 말 그대로 기호품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유럽의 근대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기호품으로 차와 커피의 위상은 절대적이다.

에티오피아의 산간 지방에서 자생하던 커피는 6세기경 드디어 이슬람 지역의 본토라 할 수 있는 예멘의 일부 지역에서 인공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했다. 이후 이슬람 사제들 간에 유통되어 음용되던 커피는 15세기경에 이르러 비로소 대부분의 가정과 공공장소에서 마실 수 있게 된다. 16세기에 이르러서는 메카를 비롯, 카이로 콘스탄티노플 등지에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전용 공간, 즉 세계 최초의 커피하우스들이 탄생하게 된다. 한때 커피 음용 자체와 커피하우스에 대한 탄압이 있기도 했으나 커피는 이미 대중들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음료로 확고한 위치를 갖게 된다. 오히려 이슬람교의 전파에 따라 북아프리카와 인도 지역, 이슬람교가 들어간 유럽의 일부 지역인 스페인까지 흘러들어가게 되었다.

그렇다면 유럽으로의 커피 유입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커피를 유럽에 처음 소개한 이들은 1600년경 유럽과 이슬람 지역과의 무역을 주도하고 있던 베네치아 상인들에 의해서라는 것이 정설이다.  당시의 유럽 사회 분위기는 동방(이슬람 지역과 인도를 뜻한다)에 대한 신비감이 충만되어 있던 사회로서 후추를 중심으로 한 향신료의 광적인 동경으로 비추어 볼 때 초기의 커피 또한 그러한 맥락에서의 전파가 아닐까 생각한다. 

한편 17세기의 유럽은 술에 취해 있는 세계 그 자체였다. 17세기 후반 영국의 성인이 하루에 마시는 맥주의 양이 3리터에 달한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커피야말로 술의 강력한 대체품이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이 시기 유럽에서도 지금의 카페와 같은 의미로서의 커피하우스가 폭발적으로 생기기 시작한다.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에서 시작된 유럽의 커피 소비가 이윽고 커피를 전용으로 끓여 파는 곳, 즉 커피 하우스의 등장을 불러일으켰으며 1650년경에는 영국 런던에도 등장한다. 기록에 의하면 1700년 초 런던의 커피 하우스는 기록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대략 약 2,000 ~3000 개에 달했다고 한다.  

이에 비해 차의 역사는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 윈난성에서 인류 최초로 재배되던 차는 원래 채소처럼 조리해서 먹던 식품이었으며 후한시대(AD 25년~220년)에 이르러 현재와 같이 음료로 마시게 되었다고 한다.  

차의 유럽 유입 시기는 커피와 비슷하다.  유럽에서 처음으로 차를 마신 나라는 네덜란드로 알려져 있다. 1602년 설립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중국으로부터 차를 수입하기 시작한 때가 바로 1610년경이다. 하지만 이때 수입된 차는 유럽에서 흔히 마시는 발효차인 홍차가 아니라 녹차였다. 그러다가 18세기 후반에 들어와 반발효차인 우롱차를 개량해 완전 발효차인 홍차를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홍차는 특히 영국에서 압도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이는 당시 서인도 제도에서 대량으로 수입되던 설탕을 넣어 마시면 녹차보다도 더 훌륭한 맛을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이 특히 커피가 아닌 홍차를 선호하게 된 이유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당시 차를 독점 수입하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이어 영국 역시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게 되고 커피보다 상대적으로 안정적 공급이 가능한 차의 수입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여기에 17세기 영국 왕 찰스 2세와 결혼한 포르투갈의 캐서린 공주에 의해 영국 사교계에 티타임 문화가 생겨난 일 역시 영국의 차 소비에 영향을 주었다.

19세기가 되자 폭발적으로 증가한 차의 수입 자금을 얻기 위해 영국은 모직물과 면화의 대중국 수출에 매진 했으나 워낙 차 수입이 여타 물품의 수출을 초과했다. 그러므로 중국에 대한 결제수단인 은(銀)의 막대한 유출은 급기야 영국의 경제적 위기까지 초래하게 되었다. 따라서 차의 수입대금으로 은 대신 지불할 대체 수단을 강구했고 그것이 바로 아편이 된 것이다.

중국 유입 초기 아편은 워낙 고가였던 터러 일부 상류층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1818년에 기존의 아편보다 훨씬 저렴하고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는 ‘파트나’ 아편이 개발되면서 부터 중국내 아편 중독자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차의 수출 대금 유입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양의 은이 아편 수입 대금으로 유출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중국의 경제는 거의 붕괴 지점에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이에 중국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여 수백만 달러에 이르는 아편을 강제로 압수한다. 이외에도 아편 중독 확산을 막기 위해 외국 상인들의 아편 판매 행위에 대해 강력한 규제 조치를 시행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이러한 조치들에 반발한 영국은 1839년 아편의 자유로운 거래를 요구하며 중국에 대해 선전포고하였고 1840년 드디어 아편전쟁(1840~1842)을 일으키게 된다. 하지만 애초부터 제대로 된 군대 조직이 없었고 무장이 열세였던 중국은 쉽게 패전, 1842년 굴욕적인  ‘난징조약’에 조인하게 된다. 난징조약은 결국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여러 열강들의 중국 침탈에 길을 열어준 결과가 되었다. 중화사상이라는 전근대적 아둔함으로 자만했던 중국은 이후 ‘잠자는 종이 호랑이’라는 치욕스러운 꼬리표를 달게 되었다. 또한 이때 체결된 난징조약으로 홍콩을 영국에 할양하게 되었으니 최근 홍콩에서 발생하고 있는 여러 문제가 바로 근본적으로는 이 아편전쟁으로부터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아편전쟁의 원인은 단순히 아편뿐만이 아닌 차와 커피에 얽힌 기호품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작 기호품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라니 믿기 어렵지만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이쯤 되면 커피와 차는 단순히 사람들의 미각을 자극하는 기호 음료를 넘어 제3세계 문제와 신자본주의의 폐해, 국가간 빈부 격차와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 특히 현재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흑백인종갈등으로 촉발된 혼란과 시위등 현대 세계가 공통으로 직면하고 해결해야 할 거의 모든 비극을 만들어 낸, 욕망의 물질이라 부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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